시커먼스와 관짝소년단, 인권 감수성 30년째 그대로
19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익숙한 코미디 코너가 있을 것이다. 바로 ‘시커먼스’다. 본래 1987년 KBS에서 방송한 특집 프로그램 ‘세계폭소가요제’에서 ‘블랙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코너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곧바로 당시 KBS의 코미디를 대표하는 프로그램 ‘쇼 비디오 자키’의 정규 코너로 등극하게 되었다.
지금은 코미디언 박미선의 남편으로 유명한 코미디언 이봉원과 ‘부채도사’ 등의 캐릭터로 세간을 풍미한 코미디언 장두석이 진행하는 ‘시커먼스’는 일종의 ‘음악 개그’였다. 아직 한국에서 팝 음악이 인기가 있을 시절, 1980년대부터 서서히 미국에 퍼지고 있던 장르인 힙합이 조금씩 한국에도 밀려 들어왔다. ‘시커먼스’는 당시 한국으로서는 생소했던 힙합 음악을 활용하는 코너였다. 1984년에 데뷔한 힙합의 선구자 Run D.M.C의 노래 ‘You Be Illin’의 비트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그 위에 나름 리듬을 맞춘 코미디 대사를 붙이는 식이었다. 일각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한국 힙합과 랩의 선조라기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왜 코너 이름이 ‘시커먼스’였을까? 이름대로 이봉원과 장두석이 우스꽝스러운 흑인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코너였기 때문이다. 얼굴을 검은 색으로 색칠하고, 흑인들에게 자주 볼 수 있는 심한 곱슬머리나 곱게 땋은 레게머리 가발을 하고 매화마다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처음이나 다를 바 없었던 힙합 비트를 활용한 ‘시커먼스’의 코미디는 금새 장안의 화제가 되었지만, ‘흑인 분장’이 지니는 문제성을 잘 알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조금씩 이 코너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1988년 9월 6일 한겨레신문의 독자 오피니언 코너 ‘국민기자석’에 게재된 양철준 씨의 의견은 현재 발견할 수 있는 사료 중에서는 몇 안 되게 당시 ‘시커먼스’ 코너에 대한 문제 의식을 드러낸 글이다.
인간을 피부색이나 인종에 따라서 다르게 대접하고 평가하는 것은 인종주의적이고 문화제국주의적 행동이다. (중략) ‘시커먼 사람들’ 쯤으로 언뜻 이해되는 이 용어(시커먼스)는 ‘검은 것’에 대한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중략)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배우는 흑인으로 분장을 하고서 우스꽝스런 몸짓과 말로써 시청자의 눈과 귀를 인종주의로 마비시킨다. 거기에서 투영된 흑인의 모습은 원시적이고 무지몽매한 인물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아이가 어른의 얼굴을 떄리는데도 우스꽝스러운 동작만 반복하고 있는 인륜과 자기 주체성을 결여한 인물로서 되어 있다. 설혹 그 프로그램의 제작 동기가 무미건조한 일상에 여유와 웃음을 선사하려는 것이었다 해도 그 결과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존엄성을 박탈하려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후략)
KBS ‘시커먼스’ 인종 편견 드러내, 한겨레신문, 1988년 9월 6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이 독자의견은 여러모로 ‘시커먼스’가 지니고 있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지적하고 있는 중요한 글이다. ‘시커먼스’가 시도한 ‘흑인 분장’은 갑자기 한국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흑인 분장 코미디의 원조는 남북 전쟁 이후인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에서 유행한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이다. ‘민스트럴’은 단어 그 자체로는 중세 유럽 시기의 궁정 연예인이나 음유시인을 뜻하는 말이지만, 뒤에 ‘쇼’가 붙는 순간 근대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통용되었다.
길었던 남북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 미국인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상에서 뭔가 유쾌하고 재미난 것들을 찾길 원했다. ‘민스트럴 쇼’는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종 코미디와 댄스, 음악 공연을 총 망라한 일종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쇼’였다. 무척이나 미국에서 인기있었던 쇼였지만, 이 쇼에는 한 가지 중대한 특징이 있었다. 백인 출연자 상당수가 흑인 분장을 하고,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행동을 했다. 그것도 단순히 웃긴 행동이 아니라, 흑인들에게 가해졌던 편견인 ‘우둔하고 멍청하다’는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는 코미디였다. 소수의 흑인 출연자도 있었지만, 이들 흑인 출연자 역시 어딘가 굼뜬 행동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본래 흑인이 아닌 사람이 흑인 분장을 하는 행위, 줄여서 ‘블랙 페이스’(blackface)는 단순한 얼굴을 검게 칠하는 흑인 분장이 아니라 흑인 자체를 모욕하고 비꼬는 중대한 인종 차별적 행위로 정의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의 한국은 인종 차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흑인을 ‘검둥이’라고 칭하는 것은 물론이며, 한국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동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공공연하게 존재했다. 심지어 2005년까지는 ‘외관상 명백한 혼혈인’은 용모를 이유로 군에 입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오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에는 공분해도, 정작 자신들이 벌이는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1980년대 한국의 씁쓸한 단면이었다. ‘시커먼스’의 인기는 ‘블랙 페이스’가 왜 문제인지를 좀처럼 알지도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은 시대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러나 내재된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속적 인기를 얻고 있던 ‘시커먼스’는 1988년 갑작스럽게 폐지되었다. 그 해 열리는 서울 올림픽이 문제였다. 서울 올림픽을 맞이해 정부는 ‘외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미화 정비 사업에 나섰다. 그 ‘미화 정비’는 외국인들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은 강조하고, 부정적으로 보일만한 모습들은 모두 없애버리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렇게 올림픽을 앞두고 부랴부랴 도로 정비를 비롯해 음식 모형 보급, 식당 메뉴나 표지판의 외국어 병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간 허용되지 않던 ‘생수’(먹는 샘물)가 외국인들 한정으로 허용되었다. KBS가 최초의 국산 TV 애니메이션 ‘떠돌이 까치’를 만든 이유 중 하나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국산 애니메이션’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멋있게 보이는 것을 빠르게 도입했던 것처럼,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빠르게 없애거나 밀어냈다. 김동원 감독의 독립 다큐멘터리 ‘상계동 사람들’이 다뤄냈던 모습처럼 빈민들이 거주하던 전국 곳곳의 판자촌들이 강압적으로 해체되어 살던 사람들이 모조리 쫓겨났다. 결국 언젠가는 비판의 소지가 될 수 밖에 없었지만, 외국인들이 개고기를 혐오한다는 이유로 보신탕집 상당수가 폐업을 종용받거나 ‘사철탕’과 같은 명칭으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시커먼스’가 표적에 올라갔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시커먼스’는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분명 ‘시커먼스’는 이미 코너가 시작되던 당시부터 문제가 많은 코너였고, 어떤 식으로든 비판을 받고 폐지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커먼스’는 해당 코너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을 공론화하는 방식으로 폐지되지 못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노태우 정부가 부랴부랴 외국인들이 보는 눈을 무서워해 후다닥 덮는 방식으로 끝이 났을 따름이다. 정부는 ‘시커먼스’ 코너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지적하지도 않았으며, KBS나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마치 상당수의 검열처럼, 윗사람들이 보기에 불편하게 느껴지니 빠르게 없앨 따름이었다.
당연히 ‘시커먼스’의 폐지는 한국의 인종 차별 인식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코너를 직접 기획하고 출연한 당사자인 코미디언 장두석도 2010년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정부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잘 나가던 코너를 폐지시켰다’는 식으로만 언급할 뿐, 자신의 코너에 어떤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었는지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두석 본인은 2008년 숭례문이 화재 사건으로 전소되자 이를 소재로 다시 ‘2008년판 시커먼스’를 만들었다. 그것도 자신이 과거 출연한 ‘시커먼스’의 영상과 함께 말이다.
‘시커먼스’가 폐지되고 한참 뒤에 데뷔한 KBS의 코미디언들도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코너 자체는 폐지되었지만 ‘시커먼스’는 잊을만 하면 다시 언급되었고, 온갖 코미디 특집에 종종 출연하는 일도 잦았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시커먼스’의 비트를 그대로 가져온 일종의 헌정 코너 ‘키컸으면’이 KBS ‘개그콘서트’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제대로 된 비판과 지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폐지한 대가였다.
어디 그 뿐일까. ‘시커먼스’가 폐지된 이후에도 ‘블랙 페이스’는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무수한 광고들과 코미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심심치 않게 흑인 분장을 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성찰 없는 인종 차별은 더욱 확대되었다. ‘흑인 분장’에서 벗어나 재중동포(‘조선족’)이나 동남아시아인 같이 한국에 점차 정착을 확대하게 된 이주민들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기에 바쁜 프로그램들이 대거 양산되었다. 변화한 시대에 맞춰 제대로 된 인권 교육도, 대중적으로도 차별과 혐오를 개선하기 위한 이렇다 할 기획이 부재한 상황에서 차별과 혐오는 한국 사회의 일상이 뿌리 깊게 자리잡았다.
뒤늦게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조금씩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권고를 요구했지만, 한국 사회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나마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꾼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이는 2001년 아프리카 가나 국적의 이주 노동자가 특정한 종류의 색을 ‘살색’이라 칭하는 것은 명백한 피부색 차별임을 지적하면서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해 2002년 인권위가 기술표준원에 개정을 권고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연주황’으로 바뀌었지만, 2004년 10대 청소년들이 해당 용어가 어린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움을 이유로 다시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며 ‘연주황’은 오늘의 ‘살구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TV나 영화를 비롯한 대중 문화 매체의 시선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인종 차별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이 조금씩 생기게 된 것은 한국 문화가 해외로 진출을 시도하며 본격적으로 알려진 결과였다. 동시에 한국에 이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면서, 어떠한 행동과 발언이 인종 차별적인지가 조금씩 한국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걸그룹 ‘마마무’는 2017년 올림픽홀에서 개최한 단독 콘서트에서 ‘흑인 분장’을 한 영상을 상영한 것이 해외의 마마무 팬들에게 알려지면서 질타를 받고 나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이, ‘블랙 페이스’를 비롯한 인종 차별적 행동에 대한 지적은 지적을 가한 사람에게 대한 반발과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마무’가 인종 차별 문제로 지적을 받았던 해인 2017년, 지금은 폐지된 SBS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가 같은 문제를 지적받았다. 한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코미디언이자 방송인인 샘 해밍턴은 자신의 SNS를 통해 ‘웃찾사’에서 흑인 분장을 하고 등장한 코미디언 홍현희의 행동이 대단히 문제적임을 지적하는 글을 남겼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정작 홍현희는 어떠한 입장도 남기지 않았는데, 당시 홍현희와 같이 ‘웃찾사’에 출연하던 코미디언 황현희가 갑자기 샘 해밍턴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로 대응에 나선 것이다. 황현희는 샘 해밍턴이 단순 분장을 흑인 비하로 몰아가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 칭하면서, 이는 “영구, 맹구 캐릭터가 자폐아 비하이며 시커먼스 역시 흑인 비하이지 않느냐”는 비유를 남겼다. 역설적으로 황현희가 샘 해밍턴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내선 비유는 모두 합당한 비유였다. 단지 황현희가 그러한 식의 코미디가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황현희가 샘 해밍턴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한 이후, ‘웃찾사’와 홍현희는 자신의 코미디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사과하였다.
그리고 2020년 8월 현재, 인종 차별 지적에 대한 반발은 단순한 반박을 넘어 집단적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2020년부터 한창 인터넷을 통해 유행하는 소위 ‘관짝소년단’의 모습은 재치있는 졸업사진으로 유명한 의정부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따라하면서부터였다. ‘관짝소년단’, 또는 미국에서는 ‘Coffin Dance’라 불리는 이들은 아프리카 가나의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댄서들이다. 가나를 비롯한 서아프리카 지역은 장례식 문화가 엄숙하지 않다. 비록 세상을 떠난 이후에라도 고인이 기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지역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음악을 부르거나 춤을 추는 문화가 전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단, 이러한 장례식은 병사나 사고사 같이 안타깝게 사망한 이들에게는 행하지 않는다.)
‘관짝소년단’으로 알려진 이들은 이러한 장례식 문화에서 힌트를 얻어 2010년부터 전문적인 장례식 댄서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장례식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당연하다면, 춤과 노래를 수준급으로 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에서 활약하는 사업이 분명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시작된 것이다. 무척이나 무거운 관을 어깨에 이고서도 관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춤을 추는 이들의 실력은 가나 곳곳에 퍼졌고, 유튜브 등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다 드디어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유튜브에서 가나 장례식 댄서의 모습은 무척이나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어떤 이가 실수나 사고로 고통을 받는 장면, 또는 무척이나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을 앞에 붙이고 그 뒤에 댄서의 모습을 덧붙이는 식이다. 왜 이들이 관짝을 어깨에 지고 춤을 추는 지에 대한 맥락은 어느 순간 증발된 채, ‘옷을 멋있게 빼입은 흑인 아저씨들이 관짝춤을 춘다’는 이미지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의정부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이를 아무런 고민이나 성찰없이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흑인 분장을 한 채 졸업사진에 활용하게 되었다.
이 모습을 가나 출신의 방송인 ‘샘 오취리’가 확인하고 무척이나 격앙된 반응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들이 한 블랙페이스는 흑인 입장에서 매우 불쾌하고 모욕적인 행동이며, 동시에 오랜 시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계속 이어진 고질적인 문제임을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행동이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시에 흑인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고서도 문화를 즐길 수 있음을 알리는 교육이 필요함을 언급했다.
그러나 샘 오취리의 바람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샘 오취리를 공격하고 비난하며, 다시 모욕하고 차별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댓글이 뒤덮였다. 댓글의 상당수는 오히려 샘 오취리가 의정부고 학생들을 모욕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행동은 인종 차별을 의도한 것이 아닌데 샘 오취리가 의도적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도리어 인스타그램의 태그에 K팝 전반에 대한 이슈를 지칭하는 ‘#teakpop’을 달았으니, 샘 오취리가 한국을 혐오하고 있다는 내용까지도 등장했다. 당사자가 욕설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 분노하면서도 최대한 정중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글이었지만 인스타그램에 댓글을 남긴 한국인 상당수는 오히려 당사자를 억누르고 짓밟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샘 오취리는 그러한 한국의 문화에 ‘항복’했다. 인스타그램에 사과문을 남기는 한편, 8월14일에는 그가 고정으로 출연하는 예능인 MBC에브리원 ‘대한외국인’의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서 취재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샘 오취리는 그 때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하얀 티셔츠를 입은 상황이었다. 의도가 아니더라도 분명 문제가 있는 행동에 대한 지적이었지만, 한국 사회는 이에 대한 성찰을 하는 대신 그가 사과문을 쓰고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었다.
심지어는 몇몇 언론 역시 이러한 공격에 합세하며 “샘 오취리도 옛날에 동양인을 비하하는 ‘눈 찢기’ 표정을 했었지만, 이를 대놓고 정색하거나 비판하는 시청자는 거의 없었다”는 식으로 ‘샘 오취리 너도 잘못 했다’는 식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 머니투데이 샘 오취리의 발언이 80% 불편했던 이유)
분명 샘 오취리의 과거 행동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샘 오취리의 지적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도 역시 아니다. 몇몇 여론이나 언론이 ‘샘 오취리가 문제적 행동을 했지만, 그것이 무해한 것을 알기에 시청자들은 넘어갔다’고 호도하지만, 오히려 한국 사회가 인종 차별 문제에 한국은 둔감함을 보여주는 명백한 예시일 따름이다. 도리어 샘 오취리의 지적에 폭력적으로 나서는 대응은 자신의 실수와 한계를 성찰하지 않는 적반하장이 도처에서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강한 증거가 되었다.
이미 한국 사회는 2015년에는 애꿎은 여성 두 명을 ‘메르스를 해외에 퍼트린 주범’이라 몰아가며 마구 여성 혐오적 발언을 내뱉고, 2016년에는 성우 김자연이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마구 공격을 개시해 넥슨 사의 온라인 게임 ‘클로저스’에서 하차하게 만들고 이에 항의한 다른 문화 창작자를 공격해 일부는 내쫓은 전례가 있다. 그러한 공격이 그 전까지는 주로 페미니즘을 말하는 여성들에게 가해졌다면, 이제 이러한 혐오적 공격은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내가 느끼는 폭력은 남에게도 폭력이다. 내가 차별적이라 생각한다면, 상대방도 차별적이라 생각한다. 36년간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던 한국은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의 실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시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그것이 비록 의도적이지 않았더라도, 한국인들에게 일제 강점기의 상흔은 여전히 쉽게 가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 정작 일제 강점기보다 훨씬 길게 억압되고 온갖 폭력에 시달린 흑인의 문제에는 이다지도 무지하며, 도리어 폭력을 행사하는가? 설령 그것이 의도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샘 오취리의 말대로 배우고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남에게는 역지사지를 요구하며 자신들은 하나도 역지사지를 행하지 않는 이 위선적인 모습은, 한국이 인권은 물론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무척이나 고민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