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 PD 판사가 노동자가 뭔지 도통 모르는 것 같다
고 이재학 PD 노동자성은 공식적으로 두 번 확인됐다. 한 번은 2017년 청주방송 노무 컨설팅을 진행한 노무법인 유앤의 판단이다. 유앤은 청주방송 비정규직 23명 근무 실태를 분석해 이 PD의 노동자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나머지는 지난 22일 발표된 이재학 PD 사망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다. 대법원 판례에 비춰 이 PD가 청주방송에 종속된 직원과 같았다고 밝혔다.
법원만 반대였다. 이 PD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2018년 9월~2020년 1월) 1심을 심리한 청주지법 정선오 판사(현 대전지법 부장판사)는 이 PD가 “청주방송 근로자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PD가 모아 낸 44개 증거는 정 판사가 쓴 7쪽 판결문에 1건도 반영되지 않았다.
“회사 측 증거 보면…” 이재학 44개 증거 한 순간에 물거품
대법원은 노동자성을 판단할 때 형식이 아닌 실질을 보라고 판시했다. 계약 형식을 떠나 당사자가 임금을 목적으로 한 ‘종속 관계’에서 회사에 노동을 제공했는지 보라는 것이다. 종속 관계 판단은 성격에 따라 8개 쟁점으로 나뉜다. △업무 내용을 회사(사용자)가 정하는지 △취업규칙 등 인사규정 적용을 받으며 회사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는지 △회사가 근무 장소와 시간을 정해 구속하는지 △자기 작업 도구를 가지고, 제3자를 고용해 일을 시키는 등 독립 사업을 영위하는지 등이다.
이재학 PD는 이를 증명하려고 5개월 동안 44개 증거를 모아 법원에 냈다. 대부분 자신이 청주방송 PD로 오랜 기간 간주됐고 정규직 PD와 다를 바 없이 일했으며, 관리자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일했다는 증거다.
증거 위에 자신과 동료들 증언을 보탰다. 14여년 동안 청주방송 소유 장비를 썼고 거의 모든 연 소득을 청주방송에서 벌었으며, 정직원처럼 일했다는 증언이다. 취업규칙 적용, 근태관리 유무 등을 따지는 기준은 이 PD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정직원처럼 출·퇴근했다. 그렇지 않으면 즉시 해고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이런 입장도 법원에 밝혔다.
정 판사는 이를 한 마디 문장으로 잘랐다. “회사가 낸 12개 증거와 회사 측 증인의 증언과 이 PD 과세정보를 봤을 때” 이 PD가 낸 44개 증거 내용은 노동자성을 입증하기 부족하다는 문장이다.
바로 다음 “이 PD 주장은 더 살펴볼 필요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꼼꼼하게 노동자성을 분석한 판결문이나 노동위원회 판정서를 보면 수쪽에 걸쳐 당사자 업무 이력과 내용, 사내 지위 등을 정리한다. 정 판사 판결문엔 그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 PD가 낸 44개 문건은 구체적 판단도 받지 못하고 물거품이 됐다.
“AD는 프리랜서가 맡는 게 일반적”이라는 판사
정 판사는 이어 판단 이유 6가지를 밝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연출(AD)에 대한 판단이다. 청주방송은 이 PD가 AD였다고 주장했다. 정 판사는 이를 수긍했고, CP(책임피디)와 PD(연출), AD 업무 차이를 설명한 뒤 “AD는 정규직원이 아닌 프리랜서가 담당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적었다.
판사는 관행과 원칙 차이를 혼동했다. AD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건 방송사 관행이지 노동법 준수 여부는 따져볼 문제다. 이미 청주방송 AD가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사례도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2013년 청주방송 AD였던 고 이윤재씨가 입사 10개월 만에 사망한 사고를 과로사로 인정했다. ‘이씨는 프리랜서 계약을 했다’며 노동자성을 부인한 근로복지공단 판단을 뒤집었다. (서울행정법원 2013구합7810)
정 판사가 이재학 PD를 ‘AD’라고 규정한 것도 논란이다. 이 PD 주장을 면밀히 검토 않고 청주방송 측 주장만 반영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재학 PD는 2004년부터 6년 동안 AD 생활을 하고 이후 7년을 AD·PD로 동시에 일했다. 진상조사위가 확인한 내용이다.
정 판사는 이어 이 PD가 출·퇴근 의무, 취업규칙 적용 등 근태관리에 구속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회사 일을 자율적으로 맡을 수 있으므로 청주방송 관리·감독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이 PD 동료 직원들은 출장이 없는 한 이 PD가 대부분 오전 7시께, 늦어도 9시에 출근했다고 밝혔다. 이 PD 근태는 청주방송 프로그램 제작 일정에 구속됐다. 또 정규직 PD들도 프로그램에 따라 자율로 출·퇴근 시간을 정했다. 나아가 이 PD의 해고 직전 7년간 소득 대부분이 청주방송에서 나왔다. 과도한 업무량 탓에 다른 방송사 제작 일을 할 수 없었다.
정 판사는 이 PD가 정규직과 다른 방식으로 보수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4대 보험 등이 가입되지 않았음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개인사업자가 내는 세금을 계속 납부해왔다는 이유도 댔다. 이 PD가 14년간 청주방송 장비만 주로 썼다는 주장엔 ‘일부 제공한 건 사실이나 업무 편의를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다’고 일축했다.
정 판사가 판결문에 적은 이유 대부분이 대법원 판례 취지에 어긋난다. 대법원은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했는지, 4대 보험(사회보장제도)에 근로자로 가입했는지 등 사정은 회사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다”며 이런 이유로 노동자성을 쉽게 부정해선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무성의한 한 줄 “증인 안 나와서 진술서 신빙성 못 믿어”
정 판사는 청주방송이 이 PD 노동자성과 관련된 핵심 증거를 제출하라는 법원 명령에 따르지 않았는데도 불리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문서 제출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법원은 그 문서 존재에 관한 신청인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핵심 증거는 이 PD의 노동자성이 높다고 분석된 ‘청주방송 비정규직 실태 컨설팅’(2017년 노무법인 유앤 작성) 보고서다. 이 PD는 이 자료를 전제로 말하는 청주방송 직원의 음성을 녹음해 제출했고, 차라리 노무법인에서 직접 문서를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은 이 PD 요청은 묵살하고 ‘가지고 있지 않다’는 청주방송 답변만 들었다. 지난 3월 진상조사위는 쉽게 관련 자료를 구했다.
정 판사는 이 PD가 동료직원 3명에게 받아서 낸 진술서를 “각 진술자들이 법정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한 바가 없어 그 진술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결문에 썼다. 청주방송은 진술서를 써준 직원 1명을 회유·압박해 진술서 제출을 취소시켰다. 이어 ‘내용을 자세히 보지 않고 인간적 관계를 생각해 써줬다’는 사실확인서를 받아 법정에 증거로 냈다.
진상조사위는 “경험칙에 비춰 보면, 회사 직원이 회사 반대편에 선 원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진술서를 써주는 건 상당한 불이익이 따를 수 있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진술서가 제출됐다면 신빙성이 높다고 봐야 하고 단지 증인으로 나와 증언하지 않았단 이유만으로 이를 배척한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이 PD는 지난 1월22일 선고 직후 통화에서 "판사가 노동이 뭔지, 노동자가 뭔지 도통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PD는 이달 30일 항소장을 냈으나 5일 뒤 자신이 거주한 아파트 지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가족이 2심 소송을 수계해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