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직장동료도 돌아서게 만든 청주방송의 회유와 압박
고 이재학 PD가 남긴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 PD가 생전 지인들에게 증언했던 CJB청주방송 측 부당 행위가 확인됐다.
청주방송은 이 PD와 ‘근로자 지위(노동자성) 확인 소송’으로 다투던 중 이 PD를 돕던 직원을 찾아내 그만두라고 압박했다. ‘이재학은 정규직 PD처럼 일했다’는 진술서를 철회하라는 요구였다. 이 과정에서 이 PD가 의형제처럼 여겼던 직원이 회사 지시에 따랐다. 22일 공개된 진상규명보고서에 실린 내용이다.
용기 내 쓴 2000자 진술서 무력화
“(2019년 7월) 어느 날 밤 A가 날 찾아왔다. 나한테 너무 미안해했다. 10년이 넘은 친구고 서로의 모든 걸 알고 있어서, 이번 소송에서 그 친구만 믿었다. 며칠 동안 ‘그것’ 때문에 힘들어한 걸 알고 있었다.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그래서 ‘너 안 힘들게 해줄게. 너(가 쓴) 진술서 빼줄게’라고 했다. 이렇게 평생을 본 친구와 끝나게 됐다.” (2019년 7월 8일 이재학 PD 증언)
이 PD는 이 얘기를 사망 전까지 언론에 숨겼다. 지난해 7월 중순 그는 자신의 부당해고 사건만 제보했고, 자신을 정신적으로 가장 괴롭힌 사건은 비공개를 조건으로 밝혔다. 자신의 노동자성을 2000자 길이 진술서로 구구절절 써준 동료 직원들이 괴롭힘을 당했고 결국 진술서를 철회했다는 얘기였다.
이 PD는 더 자세한 말도 남겼다. 그는 “A는 내 밑에 있는 ‘프리랜서’ 조연출이었다. 한두 달 전인가, 자회사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근데 A 아내가 또 청주방송 프리랜서 작가다. 회사가 A에게 ‘너 직원됐다고 함부로 하면 어떡하냐’ ‘아내는 아직 프리랜서 아니냐’ ‘가장답게 행동해야지’ ‘아직도 이재학 밑에 있듯이 할 거냐’고 압박했다”고 말했다. 당시 A씨는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내용 모르고 진술서 써줬다” 허위 진술 강요
회유·협박은 지난해 7월3일 후 시작됐다. 이 PD가 청주방송 직원 A·B씨와 퇴사한 C씨 진술서를 법정에 낸 날이다. ‘경위파악’부터 진행됐다. 간부회의에서 사장이 경위파악을 지시하자 윤아무개 경영기획국장과 하아무개 편성제작국장이 경위서 제출과 진술 취소 종용에 나섰다. 부하 직원을 시켜 일주일 가량 A·B씨를 질책하고 압박했다.
한 부하 직원은 이들에게 ‘회사가 소송에서 져도 문제 일으킨 사람은 살아남고 진술서 써준 사람만 피해본다’거나 ‘누구 편인지 잘 생각해라’, ‘인간적으로 서운하다. 그동안 우릴 나쁜 놈으로 본 거냐’ 등이라고 거듭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A씨에게 ‘연봉계약직인데 먹고 살아야지 네가 굳이 이렇게 해야 했느냐’고 말했다.
A·B씨는 결국 일주일여 후 경위서를 썼다. 이를 보고받은 편성제작국장은 빨간 펜으로 ‘첨삭’했다. 이재학 PD의 ‘PD’를 삭제했고 일부 문구 수정을 지시했다. 반려된 경위서를 받고 두 사람은 수정된 ‘2차 경위서’를 다시 올렸다.
회사는 이들에게 ‘사실관계 확인서’ 작성도 지시했다. 이 PD가 법원에 낸 동료 진술서를 무력화시킬 용도였다. B씨는 쓰지 않았고 A씨는 썼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A씨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내용을 넣었다. “진술서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고 인간적인 관계를 생각해 진술서에 서명해줬다”는 문구다. 초안을 본 윤 경영기획국장이 ‘이렇게 적으면 아무 필요 없다’며 다시 쓰라고 지시하면서 넣도록 한 표현이다. 청주방송은 이 사실관계 확인서를 증거로 법정에 제출했다.
자기 사건보다 ‘회사 괴롭힘’ 막으려 언론 제보
이 PD에게 진술서 의미는 남달랐다. 자신의 근무 실태를 증명할 자료는 대부분 청주방송이 갖고 있었다. 알음알음 구해보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비민주적 조직문화를 알기에 직원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진술서는 구조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이 PD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증거였다.
진술서는 판결에 일절 반영되지 않았다. 1심을 심리한 청주지법 정선오 판사는 “진술자들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한 바가 없어 진술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만 밝혔다. 고용 관계상 회사 직원이 이 PD에게 진술서를 써주기 어려운 구조에서 제출됐음에도 무성의하게 증거를 기각했다.
이 PD가 ‘지난해 7월’ 언론에 제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이 진술서를 법정에 제출한 직후 청주방송 압박이 다방면으로 진행되던 때다. 자신을 도와준 직원들이 힘들어하던 사실을 안 이 PD는 회사의 압박을 막기 위해 언론을 찾았다. 결국 회사의 압박이 성공하면 법원이 진술서를 부정할 것도 예상됐기에 더 막으려 했다.
진상조사위는 “청주방송의 압박이 없었다면 (A·B씨가) 경위서나 사실관계 확인서를 작성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특히 청주방송 지시로 쓰게 된 A씨의 확인서는 “고인이 인간적 관계를 이용해 당사자 의사에 반해 진술서를 제출했다고 오해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진상조사위는 일련의 행위는 형법상 강요나 협박,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위반, 헌법상 양심의 자유 침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회유·압박 등을 지시했다고 지목된 간부들은 모두 진상조사위에 이 사실을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