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보다 더 기자 같은 삶 故 김세은 교수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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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보다 더 기자 같은 삶 故 김세은 교수가 남긴 것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별세 소식에 언론계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암 투병 중이던 고인은 지난 15일 새벽 1시56분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 그의 부고 소식에 수많은 전·현직 언론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추모의 글로 채워졌다.

김 교수는 공영언론 정상화에 앞장선 학자다. 그는 ‘공영방송 정상화’를 기치로 내건 KBS·MBC 언론인들의 파업 직전인 2017년 7월 한겨레에 당시 고대영 KBS 사장과 김장겸 MBC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물러나라” 칼럼을 기고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면 전체를 “김장겸은 물러나라”, “고대영은 물러나라”로 채우며 불공정 방송에 침묵하던 공영방송 기자·PD들의 마음에 투쟁의 불을 댕겼다.

여느 학자처럼 ‘글’만은 아니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의 파업 100일째인 2017년 12월12일 김 교수는 ‘릴레이 발언’에 동참했다. KBS 기자·PD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순치된 자사의 편향 보도를 반성하고 공정방송을 다짐하는 발언 현장에 현직 교수 신분으로 참석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자리에서 “흔히 연구자는 연구로 말한다는 말을 한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현장에 나가거나 행동하는 것보다 한 걸음 떨어져 거리두기를 하면서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것이 나름의 역할이고 할 일이다, 그렇게 얘기한다.(...) 저도 한때는 연구자는 논문으로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청정한 중립의 지대에서 고고하게 연구자 품위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런 태도가 어쩌면 깨끗함을 가장한 외면이라는 걸, 안이하고 비겁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걸, 그리고 그런 안이함과 비겁함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언론에 대해 배웠던 것, 그리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일들이 언론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하고 지낸다는 건 이른바 지행합일이 안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무겁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사진=한국언론학회.▲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사진=한국언론학회.

당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장으로 파업을 이끈 성재호 방송기자연합회장은 “김 교수가 한겨레에 기고한 ‘물러나라’ 칼럼은 파업이 시작되기 전의 기고였다. 그의 ‘직설’은 우리에게 매우 큰 힘이 됐다. 구성원들이 우리의 공정방송 투쟁이 정당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계기가 됐다”며 “김 교수의 릴레이 발언도 행동으로써 연대를 보여준 사례로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치 권력 외압에 굴하지 않은 학자였다. 박근혜 정권이 사실상 임명한 다수의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이사들은 김 교수가 집필 주도한 ‘2016년 MBC 경영평가 보고서’ 수정을 무리하게 압박했다. MBC 보도·시사 분야 집필을 맡았던 김 교수는 보고서에 PD수첩 등 MBC 시사 보도 프로그램에서 정부 정책 검증과 권력층 비리 고발이 사라졌고, 공정방송을 위해선 공정방송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전향적 노사 관계가 요구된다고 썼으나 극우·뉴라이트 계열의 방문진 이사들은 이 같은 보고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당시 방문진에서 김 교수의 경영평가 보고서가 폐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김 교수와 함께 다수 이사들의 횡포에 맞섰던 이완기 전 방문진 이사는 “보도 부문을 맡은 김 교수가 MBC 보도 시사의 문제점을 세게 비판했다. 당시 (박근혜 정권이 임명한) 다수 이사들이 극도로 반발했고, 보고서 승인을 지속적으로 지연했다”고 설명했다. 전원구조 오보 등 2014년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MBC의 왜곡 보도에 “사고 발생 실태와 원인, 희생자 대책, 유가족 반응, 검찰과 경찰의 대책, 여론 동향 등에 대해 상세히 보도하는 성과를 거뒀다”(2014년도 MBC 경영평가보고서)고 평가한 학자들의 곡학아세와는 뚜렷히 구분되는 김 교수의 ‘소신’이었다.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의 파업 100일째인 지난 2017년 12월12일 김세은 교수는 ‘릴레이 발언’에 동참했다. KBS 기자·PD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순치된 자사의 편향 보도를 반성하고 공정방송을 다짐하는 발언 현장에 현직 교수 신분으로 참석한 것이다. 사진=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유튜브 화면 갈무리.▲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의 파업 100일째인 지난 2017년 12월12일 김세은 교수는 ‘릴레이 발언’에 동참했다. KBS 기자·PD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순치된 자사의 편향 보도를 반성하고 공정방송을 다짐하는 발언 현장에 현직 교수 신분으로 참석한 것이다. 사진=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유튜브 화면 갈무리.

김 교수는 독재정권과 정치권력에 순응했던 한국의 언론사에서 해직 언론인과 저널리스트가 갖는 의미에 천착했던 학자다.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다 해직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기자들을 인터뷰한 ‘해직 언론인에 대한 생애사적 연구’(2012), 동아·조선투위 해직자들과 1980년 신군부의 언론 검열에 저항했던 해직 언론인들을 연구한 ‘해직기자들의 삶과 직업’(2010년), ‘‘신’해직 언론인의 ‘압축적’ 생애사를 통해 본 한국 정치권력의 언론 통제’(2017년) 등 논문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하다가 해직된 뒤 2017년 8월 복직한 노종면 YTN 기획조정실장은 “정작 우리는 해직 언론인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해직 언론인이 한국 언론사에서 지닌 의미를 학술적으로 다뤄주신 분”이라며 “해고자 신분 시절 김 교수와의 논문 인터뷰는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였다. 그의 논문은 우리 해직 언론인들에게 큰 힘이 됐을 뿐더러 우리가 저널리스트로서 앞으로 무엇을 보도하고 주목해야 하는지 깊게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2012년 MBC 언론인들의 공정방송 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후 2017년 12월 MBC 사장으로 방송 정상화에 주력했던 최승호 뉴스타파 PD도 “다른 훌륭한 학자 분도 계시지만 김 교수는 해직자 삶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불후의 기록으로 남겼다”며 “망가진 공영언론을 실질적으로 바꾸기 위해 논문 작성 이상으로 노력하신 분”이라고 평했다. 최 PD는 “기록의 과정에서 누군가와 갈등에 부딪힐 수 있고,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는데도 타협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 감내하셨다는 점에서 훌륭한 학자로 기억하고 있다”며 “현업 기자들과 PD들이 김 교수 별세에 유독 아쉬워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 2017년 7월28일자 김세은 교수의 한겨레 칼럼. 그는 고대영 KBS 사장과 김장겸 MBC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물러나라” 칼럼을 기고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7년 7월28일자 김세은 교수의 한겨레 칼럼. 그는 고대영 KBS 사장과 김장겸 MBC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물러나라” 칼럼을 기고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성재호 방송기자연합회장은 “기자들보다 더 저널리스트적으로 살아오셨던 것 같다”며 “학자분들이 공영언론을 비평할 때 때때로 날카롭지만 애정 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김 교수는 언론인과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지금도 각별하다”고 밝혔다. 김경환 상지대 언론광고학부 교수(현 방문진 이사)는 “그는 자신의 연구와 소신을 현장과 실제 생활에서 굴하지 않고 관철시켰다”며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지켰고, 저널리즘 이해가 누구보다 높았던 학자”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2018년 연합뉴스 대주주인 뉴스통신진흥회 이사를 맡아 올해 초까지 헌신했다. 암 투병으로 생명의 기운이 사그라드는 상황에서도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은 “올해 뉴스통신진흥회에서 콘텐츠평가단 소위원장을 맡은 김 교수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지난 3월까지 참석을 이어갔다. 건강을 염려한 이사들이 그의 출석을 말렸는데도 그는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며 “최근 3개월 불출석 때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던 것으로 안다. 최근에는 우리도 겁이 나서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고 상황만 전달받곤 했는데…. 너무나 안타깝다”고 고인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김 교수는 2017년 방송기자연합회의 ‘방송기자’ 11·12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수많은 언론인들이 파업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그토록 갈구하던 공정방송은 과연 무엇이었나? 어떤 방송이었나? 이제 언론인들 스스로 그것을 증명하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언론 자유 수호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각종 제도와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해야 한다. 나아가 자율성 침해 사례는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공유해야 하며,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기자 전체의 문제, 언론 자유의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려면 나의 취재와 보도가 언론을 구성하고 대표한다는 자신감과 책임감이 수반되어야 하며, 그 기반은 철저한 전문성에 두어져야 한다. 공부하는 기자, 토론하는 언론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언론의 공정성은 언론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김 교수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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