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기업까지 불똥 튈라… 세계 언론들, 아베 비판
일본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통상 분쟁이 세계 자유무역 체제의 근간을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면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비난하는 세계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미 CNBC는 31일(현지 시각) "한·일 갈등 고조가 양국 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에도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1일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할 당시만 해도 국제적으론 'IT 산업의 지엽적 문제'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 조치가 장기화되고 1100여 개 품목의 수출 통제를 강화하는 화이트리스트(전략 물자 수출 심사 우대국) 배제까지 나아가자 아베 총리를 향해 '무역 보복을 철회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현물 가격이 20% 이상 급등하면서 '글로벌 스마트폰 가격이 올라갈 수 있다'는 현실적 문제가 피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9일(현지 시각) 영국 텔레그래프는 "한·일 분쟁이 미·중 무역 전쟁보다 전 세계 경제에 더 큰 파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한·일 갈등 해결에 소극적이던 미 트럼프 행정부가 방콕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변한 것도 이런 우려를 반영한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한국에 대한 사실상의 전면전을 벌이는 것에 대해 '전후 자유무역 체제의 패러다임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의 조치로 한국의 주요 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면 세계 각국이 '핵심 제품은 국산화해야 살아남는다'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라며 "이는 국제 분업을 통한 글로벌 공급망을 위축시켜 모두가 못살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유력 언론들은 일본이 한국과 벌이는 역사 분쟁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복함으로써 "글로벌 IT 산업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유무역 신봉자를 자처하다가 정작 한·일 간 문제에서 자유무역 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아베 총리의 이율배반적 태도가 일본에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서구 언론 "한·일 갈등… 미·중 분쟁보다 세계경제에 더 큰 파장"
AP통신은 29일(현지 시각)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국 업체뿐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글로벌 기술 생태계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나라 업체들에도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CNN 역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61%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부품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글로벌 IT 수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일 분쟁이 복잡하게 얽힌 국제 분업 체계를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결국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점도 주목 받고 있다. 애플, 화웨이, 소니 등 미국, 중국, 일본 기업들도 반도체 공급 가격 상승으로 타격을 받게 되고 이는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호주 ABC는 28일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생산해 애플과 화웨이 등에 판매하는 반도체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결과적으로 전 세계 스마트폰 가격이 올라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했다. 시장조사 업체 IHS마킷의 라지브 비스와스 아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ABC에 "작년에 한국이 수출한 반도체는 총 1270억달러어치에 이른다"며 "(한·일 갈등은) 결국 스마트폰, 컴퓨터, 서버 등 완제품 가격이 오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한·일 분쟁이 미·중 무역 전쟁보다 전 세계 경제에 더 큰 파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29일 "실리콘밸리가 두려워해야 할 무역 전쟁은 미·중 간 다툼이 아니라 한·일 간 분쟁"이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對)중국 무역에 대해 거친 언급을 수년간 해왔음에도 양국 간 무역 전쟁은 서서히 달아올랐을 뿐 끓어 넘치지는 않았으나, 한·일 간 갈등이 길어지면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에 의존하는 인터넷 기업들의 컴퓨터 서버 관리에도 악영향을 미쳐 인터넷 경제 자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2일 '한국을 상대로 한 아베 신조의 가망 없는 무역 전쟁'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본의 수출 규제를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고 해제를 촉구했다. 블룸버그는 "정치적 분쟁에 통상 무기를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다"며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총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본이 이웃 나라 한국을 상대로 시작한 어리석은 무역 전쟁에서 빠져나오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도 손해 보는 자해적 조치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70여 년간 자유무역 체제의 최대 수혜자였다. 특히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2017년 1월 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간 자유무역 협정이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전격 탈퇴하자, 나머지 11국을 추슬러 자유무역협정(CPTPP)을 출범시켰다. 아베 총리는 지난 4월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에서 "국제사회의 최대 중요 과제는 자유무역 체제 견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아베 총리가 이번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로 국제적으로 상당히 신뢰를 잃게 됐다"며 "앞으로 미국이나 중국이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일본에 대해 무역 보복 조치를 한다면 일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다.
경제계는 일본과 벌이는 경제 전쟁에서 이기려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유환익 혁신성장실장은 "한·일 경제 전쟁 전선에서 싸우는 건 결국 양국 기업들"이라며 "법인세, 노동·환경 규제 등에서 일본보다 더 좋은 기업 환경을 만들고 기업인들의 기를 살려주는 게 진정 승리하는 길"이라고 했다.
[최현묵 기자 seanc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