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 성차별 시정권고 MBC본사 찾아 부끄러운 언론사로 남겠느냐
국가인권위원회가 대전MBC에 여성 아나운서만 프리랜서나 계약직으로 채용해온 관행을 시정하고 정규직화하도록 권고하면서 MBC 응답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전MBC는 사실상 ‘수용불가’ 입장을 밝혔고 대주주인 MBC본사는 입장 발표를 미루고 있다.
‘대전MBC아나운서 채용성차별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18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위 결정을 환영하며 대전MBC는 여성 아나운서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채용 성차별 관행을 시정하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은 MBC본사와 대전 유성구 대전MBC 사옥 앞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인권위는 지난 17일 대전MBC에 성차별적 채용 관행을 해소할 대책을 마련하고 여성 아나운서들을 정규직 전환하라고 권고했다. 두 아나운서가 진정한 뒤 받은 불이익에 위로금도 지급하라고 했다. 대전MBC 대주주인 MBC본사에는 전국 계열사 채용 현황을 실태조사한 뒤 성차별 시정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다. 이번 사건은 채용 성차별 피해 당사자가 재직 중 ‘성별 분리채용’ 문제를 공론화한 국내 첫 사례다.
대전MBC는 권고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전MBC 측은 미디어오늘에 “외형상 성별 불균형 채용 양상을 띠게 된 점은 유감이지만, 여성과 남성 아나운서의 업무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진정인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한 점은 다르게 볼 소지가 있다”고 했다. MBC본사 측은 인권위의 전국 계열사 채용실태 조사 권고에 “공식 입장이 없다”고 했다.
사건을 대리한 김승현 노무사(노무법인 시선)는 “이번 인권위 조사는 증인 진술과 전국적 조사와 통계까지, 이례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나온 권고이며 길이도 50페이지에 이른다”며 “대전MBC 입장은 마치 법적 판단을 받지 않았기에 차별 행위를 멈출 수 없다는 것으로 들린다”고 비판했다.
김 노무사는 “또 하나 강조할 것은 대전MBC의 그간 악의적 태도”라며 “두 진정인에게 국민이면 누구나 누릴 인권위 진정 권리를 행사했단 이유로 보복조치했다. 진정인들은 모든 방송에서 하차되면 부당 해고로 법적 대응할 수 있었지만 회사가 프로그램 하나만을 남겨놓아 속수무책으로 생계 고난을 겪고 있다”고 했다.
유지은 아나운서는 지난해 6월 진정한 뒤 3개 프로그램 중 라디오 프로그램 1개만을 남겨놓고 모두 하차당해 월 50~60만원을 받고 있다. 김아무개 아나운서는 4개 프로그램 중 3개에서 하차해 주급 5만원에 일하다 퇴사했다.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는 대독을 통해 “내가 던진 질문은 너무도 간단했다. ‘동일한 일을 하는데 왜 동일한 처우를 받지 못하느냐’였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들어가는 문부터 달랐다. 그 길 끝에 서있던 저는 제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야겠다고 생각해 인권위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유 아나운서는 “돌아온 것은 하차통보, 분장실 사용제한, 자리정리 통보, 홈페이지 소개 삭제 등 괴롭힘이고, 인권위는 이것이 불이익 조치라고 명시했다”고 했다.
유 아나운서는 대전MBC를 향해선 “상세한 이유가 담긴 결정문을 보고도 소송을 강행하겠다는 건 1명의 여성 아나운서를 그저 짓밟고 괴롭히겠다는 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회 부조리와 노동 문제를 보도하지만 내부 문제에는 전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부끄러운 언론사로 남겠느냐”면서 “대전MBC가 인권위 권고를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끝까지 외치고 싸우겠다”고 말했다.
MBC본사의 문제해결과 MBC·대전MBC 정규직 노동조합의 연대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는 “MBC본사는 실태조사와 대책 마련 권고를 빠르게 시행하고,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도 적극 나서야 한다. 전국 MBC 계열사들의 공영성과 공익성 문제에 대한 책무를 지는 만큼 대전MBC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대전MBC와 MBC 노조 전체가 보다 전향적으로 권고를 숙독하고, 어떻게 공영방송을 살려나갈지 고민해 대안을 내놓길 바란다”고도 했다.
공대위는 “인권위 결정은 여성노동자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살리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성별분리채용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불안정한 노동자로, 변방의 비정규 노동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며 “MBC는 공영방송을 믿어온 시청자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인권위 결정을 조속히 이행하라”고 밝혔다. 정의당도 17일 환영 입장문을 내고 “채용 성차별은 결코 관행으로 치부돼선 안 된다.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범죄”라며 권고 이행을 촉구했다.
인권위는 17일 결정문을 통해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전MBC에) 신규 채용된 정규직 아나운서 4명이 모두 남성이고, 계약직 15명과 프리랜서 5명 등 비정규직에는 예외 없이 여성이 채용된 것은 오랜 기간 지속된 성차별 채용 관행의 결과”라며 “진정인들의 업무 내용 및 수행 방식을 봐도 진정인들은 형식상 프리랜서일 뿐, 사실상 근로자로서 남성 정규직 아나운서와 동일 업무를 수행했고 실질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아나운서라는 직종에서 나타나는 여성노동의 성격이 지속성과 전문성 축적보다는 우선 소비하기 좋은 젊은 여성의 필요성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채용 성차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