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 PD, 정규직 인정 이유 차고 넘쳤다
진상조사 결과 고 이재학 ‘프리랜서’ PD가 CJB청주방송 노동자로 인정받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청주방송에 종속돼 관리자 지시를 받고 보고도 했으며 촬영·편집 때도 청주방송 장비를 사용했다. 무려 이렇게 일한 기간이 14여년. 청주방송은 “이재학은 청주방송 직원으로 볼 여지가 크다”는 자체 조사 보고서도 3년 전부터 갖고 있었다.
‘고 이재학 PD 사망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3개월 간 조사 내용을 종합해 “이재학 PD는 근로기준법상 청주방송 노동자로 인정되며, 부당해고 사실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이 PD 이메일, 문자메시지부터 이 PD와 청주방송이 보유한 각종 기획안과 기안문 및 협조공문, 전·현직 직원 및 공무원 인터뷰 등을 참조했다.
이 PD는 정규직 PD보다 업무량이 2배 이상 많았다. 매주 50분 정규프로그램을 연출했던 2016~2017년 두드러졌다. 프로그램이 몰린 5~11월 중엔 매일 최소 9~10시간씩 청주방송에 ‘틀어박혀’ 일할 때가 많았다. 진상조사보고서에 실린 2017년 업무표를 보면 일주일 내내 일할 때도 있었다. 노동시간이 ‘일·월요일(1박2일 촬영)-화요일(8시간)-수요일(11시간 이상)-목요일(8시간 이상)-금요일(13시간 이상)-토요일(11시간 이상)’ 순이다.
2011년 정규프로그램 1개만 맡았던 이 PD는 2012년 2개, 2013~2014년 3개로 늘려갔다. 2015년부터 5개 이상으로 대폭 늘었다. 5~6개 프로그램 녹화, 편집, 촬영, 회의 등이 쉼 없이 진행된 탓에 업무량이 많았다. 동시에 비정기 행사·특집방송 연출도 틈틈이 맡았다. 매년 적으면 2개, 많으면 8개씩 연출했다.
“이재학은 무늬만 프리랜서” 사망 후에야 ‘인정’
청주방송은 이 PD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혀왔다. 진상조사 결과는 반대다. 조사위는 “수시로 CP(책임피디), 국장 등 상급자에게 담당 프로그램 업무를 보고하고 이들 결재와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조연출이면 연출 PD 지시에 따라야 해 지시-보고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연출일 때도 촬영장소, 아이템, 방송 구성안 등을 관리자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확정할 수 있었다.
충북 11개 지자체에서 보조금을 받아 찍는 ‘아름다운 충북’은 이 PD 노동이 집약된 프로그램이다. 그는 사업계획서, 예산서, 보조금 입찰 관련 서류, 발송공문 등을 첨부해 본부장 등에게 기안을 올렸다. 기안 명의는 담당 CP일 때가 많았는데, 정규직이 아닌 이 PD가 자기 이름으로 기안을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충북 방영사업 보조금 자부담금 이체 건’(2016년 5월12일)은 우연히 ‘이재학’ 실명으로 결재받았다. 결재라인은 ‘이 PD-팀장-국장-본부장-대표이사-회장’이었다. 이 PD는 운 좋게 이를 법원에 증거로 낼 수 있었다.
이 밖에 지자체 담당자와 사전 협의 및 논의, 보조금 신청, 정산보고서, 결과보고서 작성 등도 이 PD가 했다. 비용을 정산할 땐 경영기획국과 긴밀히 협조했다. ‘박달가요제’ 등 일부 행사 경우 이 PD가 예산을 직접 짰다. 행사 프로그램 예산 책정은 보통 정규직 PD 소관이다.
이 PD는 정규직원과 섞여 일했다. 근무지도 대부분 촬영장소나 청주방송 편집실·스튜디오였다. 기획제작국과 자회사 엔터컴 직원들이 일하는 4층엔 이 PD에게 배정된 책상도 있었다. 2016~2017년 ‘아름다운 충북’ 경우 정규직 카메라 촬영기자 1명이 함께 일했다. 박달가요제 등 행사를 맡아 중계차에서 디렉션을 줄 때도 기술국 직원, 카메라 기자 등과 긴밀히 협업했다.
‘이재학 노동자성 높다’ 인지한 청주방송, 왜 부인했나
이 PD가 사용한 대부분의 장비도 청주방송 소유였다. 카메라, 방송차량, 무대, 세트, 스튜디오, 조명장비, 책상과 컴퓨터, 편집기 등이다. CG작업도 청주방송 CG실에서 작업했다. 이 PD가 액션캠, 오스모 짐벌 등 자기 장비를 사용한 적은 있으나 잠시였을 뿐 청주방송이 해당 장비를 구입한 후엔 회사 장비를 썼다.
청주방송은 2011년 이 PD가 ‘JH M&P’라는 개인사업자를 등록해 2여년 일한 기록을 강조했다. ‘아름다운 충북’을 처음 연출한 때다. 그러나 이 PD는 2016~2017년 아름다운 충북을 촬영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일했고 그해엔 청주방송 일만 했다. 2013년부터 개인사업자를 끼지 않고 직접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았고 JH M&P는 그해 폐업됐다. 이 PD는 개인사업자를 낼 당시 한 동료 직원에게 “(일을 준) 관리자가 사업자 등록을 원했다. 다른 프리랜서들에게 일일이 회당 급여를 줘야 하는 회계 처리가 귀찮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청주방송은 2017년 이재학 PD 노동자성을 알았다. 비정규직 실태진단을 의뢰받은 노무법인 유앤은 △사용자의 업무 지휘·명령 수준 △업무변경권 보유 여부 △근무시간·장소, 인사관리에 구속된 정도 △다른 회사에서 일할 수 없을 만큼 청주방송에 종속된 정도 △작업 도구 및 물품 소유 주체 등 5개 항목에서 이 PD 노동자성이 높다고 청주방송에 보고했다. 이 PD는 조사대상 23명 프리랜서 중 5번째로 노동자성이 높았다.
이 PD는 2018년 4월부터 2020년 1월까지 1년 반 넘게 자신이 청주방송 노동자라고 주장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PD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심리한 청주지법 정선오 판사는 1월11일 이 PD 주장에 이유가 없다고 패소 판결했다. 이 PD 주장은 그의 사망 140일 후 진상조사위 결과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