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재용 보도에 제목·내용까지 꼼꼼한 가이드라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실질심사 하루 전인 지난달 7일, 삼성전자 홍보(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는 이 부회장 사건으로 바쁜 기자들에 대한 정중한 인사로 시작했다.
“연일 계속 쉬지도 못하고 저희 때문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오늘(6월7일) 일요일 아침에도 바쁘게 만들었는데. 오전에 보내드린 ‘알려드립니다’와 함께 영장 청구 관련, M&A 관련, 한일 갈등 재고조에 따른 반도체 위기 등을 해서 아래 제목으로 종합적으로 한번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에게 보도를 부탁한 이후 삼성 관계자는 기사 제목 예시 3개를 남겼다.
“<대외리스크, 사법리스크 동시다발…창사 이래 최대 위기 맞은 삼성>
<삼성 불법 없었다..대내외 리스크 동시다발로 경영정상화 절실>
<삼성, 동시다발 대내외 리스크에 정상적 경영 위축..위기 극복 도움 호소>”
‘삼성이 국내외 위기에 처했으니 이 부회장을 구속해선 안 된다’는 여론조성을 기자들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미디어오늘이 삼성 측에서 제시한 첫번째 제목예시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검색해봤다. 두 개의 기사가 나왔다.
“이재용 영장심사…대외리스크-사법리스크 동시다발, 창사 이래 최대 위기 맞은 삼성”(6월7일 이코노뉴스)
“대외리스크·사법리스크 동시다발…창사 이래 최대 위기 맞은 삼성”(6월7일 EBN)
해당 예시제목의 뒷부분만 포털에 검색했다. “‘리스크 속 리스크’… 창사 이래 ‘최대 위기’ 삼성”(6월7일 글로벌이코노믹)이란 기사가 나왔다.
삼성 측이 제시한 두 번째 기사 제목도 실제 기사로 등장했다. “삼성 ‘불법 없었다’…대내외 리스크 동시다발로 경영정상화 절실”(6월7일 EBN)
세 번째 기사제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성, 동시다발 대내외 리스크에 정상적 경영 위축..위기 극복 도움 호소”(6월7일 서울와이어)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삼성이 제목까지 달아준다”는 뒷말이 나왔다. ‘삼성이 언론사 데스크’라는 언론계 안팎의 농담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례다.
삼성 관계자는 메시지에서 기자들이 기사 작성에 참고할 만한 다른 매체(주로 뉴스통신사)의 기사를 링크까지 달아서 첨부했다. 다음은 메시지 후반부다.
“아래 관련 기사들도 참고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도주 우려’ 없는 이재용에 청구된 구속영장…法 판단은
https://www.news1.kr/articles/?3957544
■ 애플·MS는 공격적인 M&A 나서는데…국내 기업은 ‘팔짱만’
https://www.yna.co.kr/view/AKR20200607005800003?input=1195m
■ 미중 분쟁에 일본 리스크까지…반도체업계 ‘컨틴전시 플랜’ 가동
https://www.yna.co.kr/view/AKR20200607030300003?input=1195m
■ 냉랭해진 韓日, 속타는 반도체 업계…추가 조치 가능성에 ‘긴장’
https://newsis.com/view/?id=NISX20200607_0001050840”
삼성 측이 기자들에게 기사에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지도 전달한 것이다. 삼성 관계자가 첨부한 기사링크는 연합뉴스, 뉴스1, 뉴시스 등 뉴스통신사 기사들로 모두 이날(6월7일) 출고된 기사였다.
이날 삼성 측이 제시한 기사제목을 그대로 달진 않았지만 ‘대내외 리스크로 경영이 어렵다’는 내용으로 기사를 쓴 언론사는 더 있었다.
한 산업부 기자는 “삼성 공식입장은 맨 끝에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이라고 주체를 적는데 이런 메시지들은 공식입장이 아니니 공개하지 말고 그 기자만 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이기 때문에 다른 기업과 달리 이렇게까지 기자들을 관리하고 실제 기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날 오전 삼성은 “언론인 여러분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로 시작하는 입장문을 이미 발표했다. 입장문 맨 끝에는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이 달려있다.
해당 입장문을 보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무리한 보도를 자제해달라”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법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진행했고,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 역시 국제회계기준에 맞게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불법승계를 위한 주가조작 의혹 보도를 가리켜 “이러한 기사들은 객관적 사법판단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삼성은 물론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법적 판단을 앞두고 여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내용이다.
이 부회장 구속여부가 전국민적 관심사인 가운데 삼성전자 공식 입장을 전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삼성 관계자는 같은날 기자들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내 기사제목과 내용까지 요청했고, 일부 매체에서 삼성 측 가이드라인대로 기사를 써준 셈이다.
다음날인 지난달 8일, 8시간30분간 진행한 영장실질심사 결과 서울중앙지법은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실질심사를 기각했다. 삼성은 “총수 공백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며 안도했다.
미디어오늘은 2일 삼성전자 홍보관계자와 통화에서 삼성 측에서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을 설명하며 관련 입장을 물었다. 해당 관계자는 ‘어떤 직원이 보낸 메시지인지 파악이 안 됐으며 회사 혹은 홍보팀 차원의 지시는 아니었다’는 입장을 전했다. 해당 관계자는 3일 미디어오늘에 “정확한 취지는 알 수 없으나 (해당 직원이) 개인적으로 기자들 문의에 답변하고 배경을 설명하거나 이해를 구한 통상적인 내용으로 보인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