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대작 사건, 무죄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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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대작 사건, 무죄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과거의 조영남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의 조영남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까. 1960년대 데뷔한 조영남은 ‘딜라일라’ 같은 미국 팝송의 번안곡이나 ‘화개장터’와 같은 노래로 주목을 받던 가수였다. 동시에 1960년대 당시는 물론 지금도 흔한 편은 아닌 성악과 출신의 대중가수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그가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조영남은 가수라기보다는 라디오 DJ나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왕년의 스타’로 더 유명하지 않을까.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미술가’로도 알려져 있을 것이다. 

조영남이 미술에 발을 들인 것은 최근 일은 아니다. 그는 가수로 데뷔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던 1960년대부터 미술 작업을 해온 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개인전도 1973년에 열렸다. 단지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터 그가 미술에도 관심이 많고, 실제로 작업도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따름이다. 동시에 2011년부터 2012년까지 KBS에서 방송한 미술 프로그램 ‘명작 스캔들’의 진행자로 활동했던 모습은 더욱 많은 대중들에게 자신이 미술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퍼트리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조영남의 미술 작업은 2016년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거나, 미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 생긴 결과는 아니었다. 검찰이 그의 미술 작업을 ‘사기죄’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조영남의 그림은 왜 갑자기 사기 범죄의 결과물이 된 것일까. 2009년부터 조영남의 그림 작업을 함께 한 화가 송기창이 검찰에 문제를 제기한 결과였다. 송기창은 미국 유학 시절에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조영남과 안면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문화예술 활동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쉽지 않고, ‘미술’을 비롯해 진입의 문턱이 높은 영역일수록 특히 그렇다. 유학을 마친 뒤에도 송기창 작가의 생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조영남의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1년 6월 광주에서 첫 개인전을 열엇던 가수 조영남씨가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열린 `畵手 조영남 회화 45년-자유로운 영혼의 반항아 일기▲2011년 6월 광주에서 첫 개인전을 열엇던 가수 조영남씨가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열린 `畵手 조영남 회화 45년-자유로운 영혼의 반항아 일기'전 개막식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작업’의 영역이다. 송기창은 조영남이 자신의 작품을 ‘협업’한 것도 아니며, 기초적인 데생부터 채색까지 작품의 전 작업을 모두 그렸다고 폭로했다. 조영남은 송기창을 비롯해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에게 미술품을 그리기 위한 대다수의 작업을 위탁하고, 그렇게 거의 다 완성된 작품에 자신의 사인을 비롯한 표식을 남기는 이상의 작업을 하지는 않았다. 송기창은 작품을 그린 대가로 그림 한 점당 10만원 수준 밖에 받지 않았다. 이 그림에 조영남의 사인 등이 추가적으로 붙고, 조영남의 작업이라며 판매된 작품들은 평균적으로 한 점당 800만원에 판매되었다.

송기창은 제대로 된 대가를 지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 조영남이 사실상 관여한 정도가 낮은 작품에 조영남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은 범죄적 행위라 주장했다. 조영남은 작품을 그리는 작업에 조수가 관여하는 것은 미술계의 관행이며, 동시에 팝아트(Pop Art, 20세기 초 미국에서부터 시작한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미술 작업에 수용하는 경향의 작품)에서는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창안하는 것이 중요하며 송기창이 그린 작품 역시 자신이 아이디어를 제시한 작품이기에 당연히 자신의 작업이라고 말했다.

대중들의 여론은 조영남에게 지극히 불리했다. 그는 가수로 유명했지만, 2016년 이미 무수한 구설수로 소위 ‘비호감’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2005년에 발행한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을 비롯해 한국 사회에서 민감할 수 있는 영역의 발언을 내놓는 것은 물론, 미술 작업이 사기죄로 기소되기 직전 발생한 KBS2 예능 프로그램 ‘나를 돌아봐’에서 배우 김수미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더더욱 그의 비호감 이미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조영남과 배우 윤여정과 한 때 부부 사이였지만,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에 등장하며 일약 주목받던 스타의 커리어를 결혼 생활을 이유로 10년 넘게 끊기게 만들었음에도 제대로 생계를 책임지지 않은 것은 물론 숱한 바람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주목받은 것도 조영남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였다.

미술계에서 조영남의 대작 사건은 단순하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조영남이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꺼낸 ‘미술계의 관행’이나 ‘팝아트를 비롯한 현대 미술에서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말들이 한국 미술계에는 작지만 큰 파장을 만들었다. 미학 연구자 진중권은 매우 단호하게 조영남의 대작 사건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주장했다. 현대 미술은 물론 렘브란트나 루벤스와 같은 르네상스 이후나 근대 시기 무렵의 작가들도 이미 제자나 조수들이 높은 수준으로 관여하며 작품을 창작했고, 20세기 이후의 현대 미술에서는 기술의 발달과 개념의 변화로 ‘원본’을 규정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조영남은 그의 말대로 철저히 ‘관행’을 따랐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진중권은 조영남의 주장대로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 미술에서 하나의 사조로 정착한 ‘개념미술’(conceptual art,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을 발상하고 창작하는 과정과 아이디어에 초점을 맞추는 미술)의 측면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모두가 진중권의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진중권의 주장대로 역사적으로 미술 작품을 온전히 작가 한 명이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작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송기창을 비롯한 무명의 작가들에게 제대로 된 보수를 지급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문제였다. 월간 ‘미술세계’의 백지홍은 ‘미술세계’ 2017년 12월호에 게재한 기사 ‘조영남 대작 사건 다음을 생각한다’를 통하여 조영남이나 진중권 등의 주장대로 현대 미술의 특성상 실제 물리적인 작업자가 아니라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지처럼 실제 작업에 참여한 사람을 명확히 ‘크레딧’으로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번 논란을 계기로 미술계의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5월17일 YTN 보도 갈무리.▲2016년 5월17일 YTN 보도 갈무리.

조영남의 변론이나, 이를 옹호한 진중권과 그의 주장에 함께 한 미술평론가 반이정 등의 주장처럼, 조영남의 행위를 ‘미술계의 관행’으로 볼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되었다. 같은 호에 원고를 게재한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조영남과 송기창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위탁’일 뿐, 둘 사이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관계는 당연히 아니며 협업자 사이의 관계도 아니었고 조영남이 미적 실험을 위하여 송기창과 공동 작업을 한 것도 아니었음을 지적했다.

동시에 조영남의 작업을 ‘개념미술’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되었다. 2018년 한국미술사학회를 통해 ‘되돌아보는 조영남 대작 사건 : 개념미술의 오역과 통속화’라는 논문을 발표한 미술사 연구자 오경미는 개념미술은 단순히 ‘개념의 구상한 중시’하는 미술이 아니라, 동시대적 맥락에서 시공간적인 정세와 문제를 자각하는 비판적인 개입을 하는 과정이자 결과로서 발생하는 미술이라 정의를 내리며 주장했다. 그런 차원에서 개념미술을 한다고 해서 작업의 모든 전 과정을 타인에게 위탁하도 되는 것이 아니며, 아이디어는 물론 실제 작품을 만드는 과정까지 모두 전적으로 통제할 때 그것이 미술적으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개념미술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오경미는 판단했다.

하지만 이 논란은 백지홍의 우려처럼 해프닝 이상을 넘지 못했다. 진중권은 2019년 ‘역사적으로 미술계에서 대작인 것과 대작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극대화시킨 책 ‘미학 스캔들’을 냈지만 대중적인 주목도는 물론, 미술계 내부의 논쟁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그저 1심, 2심, 3심을 거치며 각 재판부가 내린 판결에 기계적인 방식으로 반응과 각종 성명이 잠시 오고 다녔을 뿐이다.

조영남은 그가 기소된 사기죄 혐의에 대해서 2017년 서울지방법원에서 1심 유죄, 201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 무죄를 받았다. 그리고 올해 6월 25일, 대법원은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며 2018년 서울고등법원의 무죄 판결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또 다른 무명 작가가 조영남을 고소하거나 재심 절차를 밟지 않는 이상, 한 번 판결을 내린 사안에 대해 다시 재판을 하지 않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조영남의 작업은 앞으로 ‘법적 무죄’를 방패 삼아 계속 꾸준히 작업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마무리 된 것일까? 조영남은 대법원으로부터 합법적인 ‘면벌부’를 부여받은 것과 별개로, 조영남의 대작 사건으로 함께 불거진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수면 아래에서 비판받던 제자나 조수와 같은 ‘작업 참여자’의 관계와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심도 깊게 논의되지 않는다.

동시에 ‘작업 참여자’의 문제는 작품 제작에 참여한 정당한 대가의 문제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위계 타파를 강조하지만, 학맥이나 작업 경력, 유명도 등등으로 쉽게 위계를 행사하기 쉬운 현재의 미술 환경에서 작업 참여자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 그리고 그 폭력은 때로는 성적인 차원의 폭력같이 심각한 수준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최근 미술그룹 ‘믹스라이스’를 통해 오랫동안 활동했던 양철모 작가의 성희롱 사건이나 모 대안예술공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고질적인 성희롱, 성차별 문제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나는 것을 택한 모 예술가의 사건은 미술계의 권위나 한정된 지원금 등의 요소가 쉽게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였다.

여기에 2010년대부터 한국 미술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예술가에게 정당한 작업의 대가를 지급하는 ‘아티스트 피’(artist fee) 구상도 계속 공회전 단계에 놓여 있거나, 오히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공공 미술관에서 말로만 ‘아티스트 피’를 이야기할 뿐 미술관 측에 지나치게 유리한 기준안을 제시하며 큰 공분을 낳은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의 미술 정책도, 미술계 주류의 논의도 미술 시장의 확대와 발전을 말할 뿐이다. 실제 미술에 참여하는 구성원들과 이들이 놓인 생태계를 고민하는 논의는 여전히 부재하며, 코로나19가 장기간 확산되는 상황에서 취약한 미술 생태계는 지금보다 더욱 활력이나 생기를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 필요했던 것은 조영남이 정말로 무죄냐 유죄냐, 그가 해왔던 행위는 관행적 합법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조영남의 논란이 단순히 조영남만의 문제인지, 그간 온갖 문제와 한계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던 한국 미술계의 문제는 없었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바꿔나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조영남의 논란은 한국 미술계를 바꾸는 단초가 되는 대신, 결국 또 하나의 ‘해프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문제적 사건이 해프닝으로 전락하는 사이, 2020년 한국 미술계와 미술을 비롯한 문화예술 정책은 조영남의 대작 논란이 처음 불거졌던 2016년보다도 더 큰 방향성의 부재에 놓여 있다. 조영남은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지금 한국 미술계와 문화예술의 현실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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