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트로트 열풍과 빈약한 음악 문화 현실
2004년의 일이다. 1970년대는 물론 2020년대에도 한국 트로트 가요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경향신문’에 ‘난 뽕짝가수가 아닙니다’는 기고문을 남기며, 자신이 부르는 가요의 장르를 ‘뽕짝’이나 ‘트로트’가 아니라 ‘아리랑’이라 불렀으면 좋겠다고 언급하며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트로트는 분명 일본이나 미국 등지의 영향을 받은 장르이지만, 오랜 시간 한국 사람이 즐겼다는 이유로 ‘아리랑’이라는 말을 붙이자는 제안이 많이 뜬금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참고 기사 : 경향신문 나훈아, ‘난 뽕짝가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나훈아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에 상관없이, 트로트는 한국 사회는 물론 TV 속에서도 꾸준히 사랑을 받는 장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80년대 이후로 이미 한국에서 트로트는 ‘촌스럽다’거나 ‘중년, 노년만 즐기는 장르’라는 인식이 박힌지 오래지만, 이러한 인식에 상관없이 트로트는 잊을 만하면 다시 화제가 되었다.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3년에 발표한 대표곡 ‘하여가’로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KBS 가요 순위 프로그램 ‘가요톱10’ 5주 연속 1위 ‘골든컵’을 딱 하나 남기고 있다가 김수희 ‘애모’가 느닷없이 1위를 차지하며 기회를 놓쳤던 것처럼. 이후로도 2000년대 장윤정과 박현빈이 당대 데뷔한 트로트 가수로서 주목받고, 2018년 원로 가수 김연자의 EDM 스타일 트로트 노래 ‘아모르 파티’가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2019년부터 다시 트로트는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시작은 2019년 2월부터 5월까지 TV조선을 통해 방송된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이하 미스트롯)부터였다. 여타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를바 없이, ‘여성 트로트 가수’만을 출연 대상으로 상정하고 경연을 붙인 ‘미스트롯’은 순식간에 화제의 프로그램으로 등극했다. 젊은 세대들만의 전유물인줄만 알았던 팬클럽과 팬덤 경쟁 문화가 중노년층에게도 확산되었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가수였던 송가인, 홍자, 정다경 등은 2020년 현재에도 계속 주목받는 인기 스타로 등극했다.
‘미스트롯’이 트로트의 열풍에 군불을 지폈다면, 코미디언 유재석이 고정으로 등장하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는 이 열풍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은 작년 9월부터 시작한 ‘뽕포유’ 기획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이라는 컨셉의 캐릭터를 맡으며 한창 싹이 타오르던 트로트에 관심을 키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놀면 뭐하니?’는 난데없이 트로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게 된 유재석의 모습을 비춰주면서 시청자들이 평소에 알기 어려웠던 트로트의 세계를 알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유산슬’ 이름으로 유재석이 트로트 음원을 발매하면서 2019년 초부터 타오른 트로트에 대한 주목은 그해 연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놀면 뭐하니?’를 이어받아 결정적으로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것은 2020년 1월부터 3월까지 방송된 TV조선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이하 미스터트롯)이었다. 제목대로 작년 화제를 일으켰던 ‘미스트롯’의 남자 버전으로 후속 기획된 ‘미스터트롯’은 전작을 압도하는 인기를 과시했다. 시청률로만 따져 보아도 ‘미스터트롯’은 닐슨코리아 집계 기준으로 1화 시청률은 10.3%를 기록, 3화 ‘미스트롯’의 최고 시청률인 16.5%를 돌파했다. 한계를 모르고 파죽지세처럼 오르던 시청률은 평균 최고 시청률 34.8%를 기록하며 2011년 종편 개국 이래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당연하게도 ‘미스터트롯’ 본선에 진출한 모든 가수들이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각각 1-2-3위에 해당하는 ‘진’, ‘선’, ‘미’에 오른 가수 임영웅, 영탁, 이찬원은 연일 예능과 TV 광고에서 모습이 빠지지가 않는 화제의 스타가 되었다. 아쉽게 3위 안에 오르지 못했지만 김호중, 정동원, 장민호, 김희재 등도 계속 화제에 오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심상치 않은 ‘미스터트롯’ 열풍에 방송계도 발빠르게 동참했다. 한창 ‘미스터트롯’이 방영되던 2월에 맞춰 MBN은 ‘미스트롯’을 연상시키는 여성 트로트 가수 한정 대결 프로그램인 ‘트로트퀸’을 4부작으로 방송했다. 질세라 MBC에브리원은 한창 ‘나는 가수다’가 인기 있던 2011-2012년에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송된 ‘나는 트로트가수다’를 부활시켜 4월까지 방송했다. SBS는 ‘미스터트롯’이 끝날 무렵인 3월부터 ‘트로트 세계 무대’에 도전한다는 컨셉으로 예능 ‘트롯신이 떴다’를 방송하며 현재까지 방송 중이다. ‘미스터트롯’을 방송한 TV조선은 더욱 과감하게 시청자들의 신청곡을 선곡하여 부르는 컨셉의 음악 프로그램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를 4월부터, ‘미스터트롯’ 최종 4위 안에 들어간 가수들을 불러 기획한 리얼리티 예능인 ‘뽕숭아학당’을 5월부터 방송 중이다.
이후로도 SBS플러스는 비트로트 가수가 트로트에 도전한다는 컨셉으로 ‘내게 ON 트롯’을 6월부터, MBN은 재차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보이스트롯’을 7월부터, MBC는 아이돌이 트로트에 도전한다는 컨셉으로 ‘트로트 명가 최애 엔터테인먼트’를 7월부터 방송중이다. 하반기에도 MBC는 전국 팔도에서 트로트왕을 뽑는 컨셉의 오디션 프로그램 ‘트로트의 민족’을, 더 나아가 KBS는 전국 팔도에서 ‘글로벌 K-트로트의 주역’을 뽑는다는 컨셉으로 ‘트롯 전국체전’의 방송을 기획 중이다. 어디 그뿐일까. JTBC ‘아는 형님’이나 MBC ‘라디오스타’를 비롯해 트로트 열풍이 불기 전부터 방송하던 예능 프로그램들도 적극적으로 ‘미스트롯’, ‘미스터르롯’을 통해 데뷔한 트로트 가수를 연속적으로 섭외하며 시청률을 모으고 있다.
‘미스터트롯’이 방송한지 반 년도 채지나지 않아 지상파, 종편, 케이블 채널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방송국의 대다수의 프로그램에 트로트가 가득 찼다. ‘미스트롯’이 방송되던 2019년까지만 하더라도 TV조선을 제외하고 타 방송사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은 프로그램은 ‘뽕포유’ 기획을 방송한 MBC ‘놀면 뭐하니?’ 정도 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2020년의 트로트 열풍은 무척 거세다. 덕분에 네이버에서 트로트를 검색어에 올리면 연관 검색어에 ‘트로트 지겨워’가 나올 정도로 트로트에 대한 피로감도 점차 거세지고 있지만, 이미 중장년 시청자가 TV 시청률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트로트 가수가 나오는 대다수의 예능이 모두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상황에서 TV의 트로트 사랑은 꺼질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한 지점이 있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을 비롯해 2020년 모든 방송국들이 우후죽순 기획하는 트로트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경연 예능’이거나 ‘리얼리티 예능’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데뷔하는 트로트 가수과 그들의 노래는 이들 프로그램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이미 오래 전에 데뷔해서 굳건한 팬덤을 형성한 중견 트로트 가수나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으로 데뷔하며 빠르게 인기를 얻은 가수들의 모습이 계속 보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새로운 트로트 노래가 나오는지는 이들 프로그램의 관심사가 아니다. 트로트 열풍인데, 정작 트로트 현재 흐름은 지워져있다.
물론 이는 갑자기 벌어진 현상이 아니다. 2009년 CJ ENM 엠넷이 오디션 프로그램 역사상 큰 획을 그은 시리즈 ‘슈퍼스타K’를 처음으로 방송한 이래 계속되고, 반복되는 흐름이다. ‘슈퍼스타K’의 모티브가 된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프로그램이 가수를 꿈꾸고 있는 지망생에 주안점을 주었던 것과 달리, ‘슈퍼스타K’를 비롯해 이에 영향을 받은 ‘K팝스타’ 등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미 데뷔했지만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한 가수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심지어 2014년 K팝스타 시즌4로 모습을 알린 가수 이진아는 이미 2012년에 CJ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신인 인디 가수 육성 프로그램인 ‘튠업’ 9기로 데뷔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가수였다. 당시에도 이미 재능이 있었던 가수지만 좀처럼 이름을 알리고 드러낼 곳이 없다가, 다시 한 번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해서 피말리는 경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의 동종 프로그램에서도 계속 반복되었다. 엠넷이 ‘슈퍼스타K’ 시리즈에 이어 다시 성공시킨 오디션 프로그램이자 힙합 전문 경연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 시리즈는 꾸준히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TV에서는 힙합을 비롯한 흑인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도, 이들이 나올만한 프로그램도 거의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미 KBS ‘뮤직뱅크’나 MBC ‘쇼! 음악중심’, SBS ‘인기가요’ 등의 주류 음악 프로그램을 주류 기획사들이 필사적으로 홍보하는 아이돌들로 꽉 자리를 메운 가운데, 힙합을 비롯해 ‘상대적 비주류’ 장르의 음악들은 심야 음악 프로그램인 KBS의 ‘유희열의 스케치북’, 춘천KBS의 ‘올댓뮤직’, EBS의 ‘스페이스 공감’ 정도에만 겨우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돌들의 사정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던 ‘뮤직뱅크’ 등의 음악 프로그램은 이미 시청률은 1-2% 이하로 추락한지 오래고, 제작진들도 이들 프로그램의 시청률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그저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발산하는 팬덤의 열광과 이를 활용하여 다시 해외로 프로그램을 파는 수출금액, 그리고 유튜브 클립을 통해서 발생하는 추가 수익이 중요할 따름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아무리 신인 아이돌이 이들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해도 극히 일부의 케이스를 제외하면 이들의 음악이 퍼질 가능성은 점차 0에 수렴한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이미 대다수 시청자들은 해당 음악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클립’만을 따로 찾아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갈 길 잃은 아이돌들에게도 방송사는 ‘솔루션’을 마련했다. 2016년부터 CJ ENM 엠넷이 출범한 ‘프로듀스 101’ 시리즈를 위시해 본격적으로 범람한 ‘아이돌 지망생 선발 오디션 프로그램’이 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몇 안 되는 계기가 되었다. MBK엔터테인먼트의 ‘다이아’,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의 ‘뉴이스트’ 등의 아이돌 그룹은 아예 소속사 차원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자사 아이돌을 띄우는 계기로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재데뷔’를 하거나 이름을 알릴 가능성도, 설사 그렇게 재데뷔를 하더라도 다시 이름을 알릴 가능성도 좀처럼 가능성이 높다고 하긴 어려웠다. 사실상 ‘프로듀스101’이나 ‘아이돌학교’ 같은 CJ ENM 계열의 아이돌 지망생 선발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면, KBS ‘더 유닛’이나 JTBC ‘믹스나인’, MBC ‘언더나인틴’을 택했던 아이돌 지망생과 기존 데뷔 아이돌들은 무척이나 큰 쓴 맛을 봐야했다. 하지만 ‘프로듀스 101’ 시리즈나 ‘아이돌학교’ 등의 프로그램조차도 결국 그 뒤에는 투표조작과 성적 향응이 있었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로 밝혀졌다. 결국 이들 프로그램에 등장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아이돌 연습생 전원이 절대적 피해자가 되었다.
이렇게 오디션 프로그램과 그 프로그램이 낳은 인기에 기댄 아류, 동종, 파생 프로그램은 매 시기마다 꾸준히 발생했다. 그러나 정작 그 프로그램이 다루는 장르는 일선 방송사에서는 ‘오디션’이 아니면 제대로 다뤄지거나 주목될 기회도 가지지 못한다. 오로지 오디션에 등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정말 운이 좋다면 본선에 진출하거나 높은 순위에 등극해서 화제를 다시 모으는 수밖엔 없다. 물론 그 프로그램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화제가 될 정도로 흥행을 할 프로그램에만 해당햐는 ‘천운’이다.
물론 트로트 장르는 앞서 언급했던 힙합이나 KBS ‘탑밴드’, 엠넷 ‘MUST 밴드의 시대’, JTBC ‘슈퍼밴드’ 등이 다뤘던 락(Rock) 등의 장르보다는 사정이 좋은 편이다. 아이넷TV나 가요TV 같은 전문 채널이 존재하며, KBS ‘가요무대’나 MBC 지역국이 함께 제작하는 ‘MBC 가요베스트’, 지역 민방이 공동으로 제작하는 ‘전국 TOP10 가요쇼’ 등의 나름대로 메이저한 정규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이들 프로그램 역시 시청률과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상대적으로 야외 행사시 호응이 높고, 제작비가 저렴하며, 그러면서도 시청률이 제법 나오기에 지역 방송국들은 트로트 프로그램을 다룰 뿐 KBS ‘가요무대’를 제외햐면 모두 서울에서 방송되지 않는다. 서울에는 이보다 더 시청률이 높고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가요무대’가 있다해도, 이 프로그램은 특성상 가수들의 신곡은 잘 편성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다른 장르에 비해서 사정이 좋을 뿐, 신인들의 노래나 상대적으로 트로트에서도 주류가 아닌 이들의 노래는 쉽게 이목에서 밀려난다.
결국 지금의 트로트 열풍은 역설적으로 계속 유행만을 따라다닐 뿐, 지금 유행하는 노래가 아닌 다른 장르의 음악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한국 음악 문화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시에 이 열풍에 KBS나 MBC 같은 공영방송도 그저 동참하기에 바쁠 뿐, 문화의 다양성과 지속가능성 같이 방송의 공공성을 이루는 중요한 지표들은 뒷전에 밀려나있다.
과연 언제까지 트로트 열풍이 지속될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는 그 열풍을 통해 계속 대중과 미디어의 뜨거운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열풍이 고작 몇몇의 인기를 위한 것에 그친다면, 진정한 열풍의 승자는 가수도, 그 가수를 좋아하는 팬도 아닌, 인기 이상의 가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한국의 방송사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