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억울하게 죽었다 카톡 남긴 그날의 기억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의 어머니는 아들의 추모 사진 앞에서 한참을 엉엉 울었다. 7월28일, 그의 명예 사원증을 가슴에 품고서였다. 선 자리는 청주방송 4층, 이 PD가 자기 집처럼 14년을 드나든 곳이다. 이날 청주방송은 사망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뒤 이 PD를 명예 복직시켰다. 살아서 원했던 일이 그의 사망 171일째 이뤄졌다.
이날 합의안으로 책임자를 규명했고 27개 이행 과제도 공표됐다. 앞으로 3년 청주방송의 약속 이행만 남았다. 사람들은 한시름 놨다며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됐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아직 유족에게 의미가 없다. 이 PD 동생 이대로씨(39)는 “형의 유지를 하나라도 어긴다면 언제든 원점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 있다”며 “아직 끝난 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이대로씨는 유족 대표로 생업을 뒤로 하고 싸웠다. 꼬박 20년 미술과 디자인만 다뤄온 그였다. 모든 게 낯설었다. 난생 처음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고 집회에서 ‘노동자’를 말해봤으며 방송사 사주에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외쳤다. 그의 171일은 ‘무늬만 프리랜서’라는 형의 억울함에 평범한 동생이 투사가 된 시간이었다. 지난 10일 서울 반포동 인근에서 이씨를 만났다.
“청주방송 쳐들어간다” 장례식장 난동
이재학 PD는 2004년부터 2018년 4월까지 청주방송에서 연출·조연출로 일했다. 2011년 연출을 시작하고선 각종 행정 업무도 떠안아 통상 정규직이 맡는 예산 작성도 했고, 정규직 PD 기안문도 대신 작성해줬다. 그러다 2018년 4월 프리랜서들 인건비가 지나치게 적다며 인상을 요구하다 해고됐다. 5개월 후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넣고 1년 반 싸웠지만 패소했다. 지난 2월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족에겐 아직 2월4일 그늘이 짙다. 부모님은 여전히 1주일에 한두 번 이 PD가 봉안된 청주 목련공원을 찾는다. 어머니는 49재 전까지 아들에게 매일 편지를 썼고, 누나도 동생 이 PD에게 매일 술잔을 올렸다. 가족이 모인 날이면 ‘이 자리에 재학이 있었으면 이런 말 했을 거다’라며 존재를 기억한다.
가족의 일상이 어떠냐는 말에 이씨는 “2월4일 이후 아직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시간이 딱 멈춘 듯하다. 가족들 입장에선 굳이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진 않는다. 예전 일상이 아니라 변한 일상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당일 이씨 기억은 절반만 남아있다. 4일 늦은 밤 장례식장에 도착한 그는 안치된 형을 보자마자 “청주방송 쳐들어간다”며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웠지만 정작 자신은 기억하지 못한다. 형이 부당하게 해고됐다는 걸 알았던 그는 그날 밤새 형의 폰과 유서를 봤다. 가족 누구도 몰랐던 이재학 PD의 부당해고 기사를 구글에서 찾았다. 형이 ‘직장갑질119’, ‘방송계갑질119’ 등 카카오톡방에 가입한 흔적도 찾았다. 메일, 카카오톡, 문자메시지 모두 동원해 연락을 돌렸다. “저희 형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라고 썼다.
장례 내내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복수해야 한다는 극단적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중심을 잡아준 건 장례식장을 찾아 준 대책위(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시민사회대책위) 사람들이다.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 최영기 방송스태프협회 사무국장, 김기영 방송스태프지부장이 함께 조문하며 ‘대책위를 꾸리자’고 제안했다. 이 PD 근로자지위확인소송 1심을 대리했던 직장갑질119 법률스태프 이용우 변호사도 이씨에게 유족 대리인이 되겠다고 말했다. 언론노조도 유족을 찾았다. 171일을 “굳건히 버텨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당연히 이기지’ 맴도는 형의 말
이 PD는 걱정거리를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시시콜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남에게 걱정을 사는 것도 마뜩잖아 했다. 그래서 가족도, 연인도 이 PD의 소송 과정을 잘 몰랐다. 소송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거의 내색하지 않았다. 이씨조차 형의 소송 사실을 소송 제기 1년 후에 들었다.
이 PD가 특히 말을 아낀 건 자신이 이긴다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부모님에겐 “당연히 이길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PD 휴대전화에도 ‘승소할 것 같다’는 메시지가 여기저기 남아있다. 청주방송에선 ‘회사가 패소할 싸움을 한다’는 말이 기정사실로 나돌았다. 그가 14년 대부분의 소득을 청주방송에서만 벌었고 연출부터 행정 업무까지, 프로그램 2~4개를 동시에 제작하면서 정규직처럼 일한 걸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족은 이 PD가 패소한 후 오열한 기억이 아프다. 지난 1월22일 판결 후 이 PD는 어머니에게 전화해 “억울하다”며 울었다. 이 PD는 이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무기력해졌다. 친구를 만나는 횟수가 줄었고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와 함께 살던 사촌동생은 사회 비리 폭로 내용을 담은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를 보면서 이 PD가 “세상에 참 나쁜 놈들 많다. 에휴...”하며 한숨을 깊게 내쉰 모습을 특별히 기억한다. 패소 13일 후 이 PD가 숨졌다.
이씨는 형을 위해 싸우면서 형을 알아갔다. 이 PD는 후배와 동료를 귀하게 챙겼다. 그는 본인이 청주방송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프리랜서라며 같은 팀 조연출, 작가들 점심을 매번 샀다. 그가 가장 공들인 2017년 ‘아름다운 충북’ 프로그램을 할 땐 연출과 조연출이 똑같이 회당 40만원을 받았다. 13년 차 연출과 1년 차 조연출 수입이 같았다. 본인이 더 받을 수 있었는데 10만원씩 조연출 2명에게 분배해줬다. 해고 원인인 인건비 인상 요구도 후배 스태프들 인건비를 올려주고자 함이었다.
‘바쁘다’는 말도 핑계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이씨는 일 때문에 바쁘다며 가족 행사를 빠지는 형과 자주 대립했다. 어머니 환갑잔치로 가는 가족 여행도 이 PD는 잠시 얼굴만 비추고 빠졌다. 이씨는 그럴 때마다 형이 친구들이랑 놀려고 거짓말하거나 핑계를 댄다고 생각했다. 형의 사망 후 청주방송 자료를 들여다보니 이 PD 업무량은 통상 정규직 PD의 2~3배였다.
이씨는 20대 초반 시절 형과 함께 살던 때도 회상했다. “집에서 뭘 챙겨서 방송국으로 갖다 달라고 말한 적도 많아요. 그럼 청주방송 1층에 가서 주거나 시간 없다며 ‘4층으로 빨리 올라와’라고 하면 4층에 간 기억이 나요. 같이 사는데도 형은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였고, 들어와도 동료들이랑 우르르 들어와서 밥 먹고 다 같이 거실에서 자다가 갑자기 새벽에 나가고…‘뭐지? 되게 재밌게 놀러 다닌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나만의 쇼 프로” 꿈꿨던 이재학 PD
유족은 이 PD 사망 직후부터 명예회복과 책임자 처벌, 청주방송 공식 사과와 비정규직 구조 개선 등을 요구했다. 언론노조, 청주방송, 유족, 시민사회대책위 대표가 모인 4자 협의체는 7월27일 50여일 간의 엎치락뒤치락 교섭 끝에 합의해 이행안을 도출했다. 27개 이행안 중 청주방송이 직접 지켜야 할 과제가 21개다.
유족은 이 PD 항소심을 강제조정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큰 용기가 필요한 양보였다. ‘판례’는 이 PD의 꿈이었다. ‘무늬만 프리랜서’인 자신의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판례를 남겨 전국 프리랜서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청주방송 내 비정규직 고용 구조개선 등 이 PD 유지를 잇는 안들을 같이 합의해내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조정은 청주방송 측 요구였다.
조정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씨가 “끝난 게 하나도 없다”고 강조한 이유다. 소송을 취하하는 대신 조정문엔 청주방송이 이 PD의 노동자성과 부당해고 사실, 사망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표명하는 내용을 넣기로 했다.
그동안 무엇이 힘들었느냐는 말에 이씨는 “형을 돕는 분들을 음해하는 흑색선전”을 꼽았다. 가장 큰 피해자가 이 PD와 유족을 대리한 이용우 변호사였다. 변호사와 유족을 이간질하는 거짓말과 선의를 왜곡하는 루머가 사태 초기부터 청주방송 내에 퍼졌다. 이 PD 사망 원인은 청주방송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며 의도적으로 접촉한 인물도 있다. 이씨는 형이 소송 중 자신을 둘러싼 직원들의 모함에 힘들어한 걸 늦게 들었다. 이씨는 “형 입장이 이해됐다. 고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뒷말에 분노한 기억이 많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편으론 ‘허망함’도 느껴진다고 했다. “합의를 발표한 기자회견 날, ‘이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는 것이다. “형이 원했던 게 100이라면 이뤄낸 건 100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낮춰갔다. ‘협상테이블’이란 단어 아래 서로 양보해서 중간을 찾자고 해버리니… 유족과 회사 간엔 ‘협상’이 먼저가 아니라, 회사에겐 ‘방어’가 먼저가 아니라 사죄와 진상규명이 먼저 아닌가.” 이씨가 말했다.
자주 되뇌는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란 것이다. 이 PD가 겪은 방송계 비정규직 남용은 청주방송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씨에겐 “이 문제를 다 뜯어고치려면 이것만으로 될까?”란 의문이 계속 남는다. 청주방송의 21개 과제 중 아직 이행되지 않아 감시가 필요한 과제만 19개가 남았다.
이씨는 청주를 갈 때마다 흰색 ‘SM3’ 자동차를 몬다. 형이 몰던 차다. 유족은 이 PD 유품 몇 개를 남겨 놨다. 이씨는 이재학 PD의 명함, 휴대전화, 신발, 헬멧을 보관하고 있다. 이 PD는 유년시절부터 오토바이를 좋아했다. 소송 중엔 ‘배달 알바’로 생활비도 벌었다. 이씨는 형이 사망 전까지 쓴 헬멧을 버리지 않았다.
이 PD의 지인 A씨는 이 PD가 “평소 자신을 ‘쇼 전문 PD’라 불렀다”며 그가 밝힌 소박한 꿈을 전했다. “나한테 쇼 프로그램 하나 쥐어 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볼 거다. 내가 섭외하고 싶은 MC를 쓴 적도 한 번 없고 하라는 대로만 해왔다. 내 이름 걸고 기획부터 제작까지 내 욕심대로 연출하는 쇼를 만들고 싶다.”
“앞으로 몇 년이 흘러도, 176일, 176개월이 흘러도 제 시간은 2월4일 그날로 멈춰 있을 겁니다. (중략) 직원 여러분, 저희 형 이재학 PD를 꼭 기억해주십시오. 방송국 떠나실 때, 저희 형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회사가 나아졌다고 고마워해주십시오.” 이씨가 지난 7월28일 이 PD 명예복직 행사에 참가한 청주방송 임직원들에게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