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성추행 사건, 동성 간 추행 왜 부각하나
7월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재신더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통화에서 한국 외교관 성추행 혐의가 언급됐습니다. 성추행 혐의를 받는 외교관은 뉴질랜드 주재 한국대사관 부대사로 근무 중이던 2017년 직원을 세 차례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뉴질랜드 방송 뉴스허브 심층보도 프로그램 ‘네이션’에 따르면 해당 외교관은 경찰 고발 한 달 전 뉴질랜드를 떠났고, 2019년 뉴질랜드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지만 한국대사관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측은 문 대통령과 통화에서 해당 외교관이 뉴질랜드 사법절차에 따라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했고, 한국 외교부는 규정에 따라 재조사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네이션’은 성추행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구체적으로 알리고 해당 외교관의 신원을 공개하는 등 성범죄 문제해결을 위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도 ‘네이션’ 보도를 참고해 해당 사건을 기사화했습니다. 그런데 피해사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제목으로 뽑거나 불필요한 사족을 덧붙인 기사들이 잇따랐습니다. 성범죄 사건만 발생하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관행이 이번에도 되풀이된 것입니다.
또 다시 등장한 ‘자극적인 제목’
‘네이션’은 (7월25일)에서 법원으로부터 입수한 성추행 피해사실을 보도했습니다. 대부분 한국 언론도 해당 보도를 옮겼는데, 현지 매체와 달리 선정적인 제목과 내용이 부각되었습니다. 조선비즈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조선비즈는 <“○○○ ○○○○ ○○○○ ○○○”… 뉴질랜드 언론보도 한외교관 성추행 전말>(7월30일 이용성 기자)에서 구체적인 성추행 피해사실을 제목으로 옮겼습니다. 피해 사실을 제목에 언급해 대중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전형적인 ‘클릭 유도성’ 기사입니다.
중앙일보도 <“○○○ ○○○○○” vs “○○○ ○○”… 한국 외교관 성추행 진실>(7월29일 이유정·백희연·윤성민 기자)에서 가해자의 혐의부인 내용과 피해자의 진술을 대결구도로 놓고 비교했습니다. 역시 제목에는 피해사실이 포함됐죠. 또 <성추행 의혹 한국 외교관 “○ ○○○, ○○○ ○○○○ ○○ ○○“>(7월29일 백희연 기자)에서 구체적 피해사실을 언급했을 뿐 아니라 혐의를 부인하는 해당 외교관의 입장만 실었습니다.
성범죄 사건을 선정적으로 그대로 옮기면 안 된다는 가이드라인은 2014년 여성가족부, 한국기자협회,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여성아동폭력피해중앙지원단이 함께 만든 <성폭력 사건 보도수첩>에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2012년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폭력 범죄보도 세부권고기준>에도 적시되어 있죠.
위 가이드라인은 피해사실을 자세히 언급할 경우 피해자를 성적 행위의 대상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이드라인만 살펴봐도 파악할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이죠. 하지만 언론은 성범죄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자극적인 보도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민언련은 2018년 <언론은 정말 미투운동을 보도할 준비가 되었을까>(2월16일), 2019년 <화성 연쇄살인사건 보도, 언론의 민낯 보여줬다>(9월26일) 등에서 성범죄 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루는 언론의 보도태도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보도방식은 성범죄 문제해결을 더디게 할 뿐 아니라 비본질적 이슈로 눈길을 돌리게 하여 2차 피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피해사실 묘사와 삽화까지 동원
이번 보도에서 두드러진 점으로 해당 사건의 문제해결과 관련 없는 ‘동성 간 성추행’ 정보를 언론이 굳이 명시했다는 사실입니다. 뉴질랜드 측에서 요구한 것은 해당 외교관이 뉴질랜드로 돌아와 죗값을 치르게 하는 ‘범죄인 인도요청’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은 뉴질랜드 측 요구사항을 전하면서도 동성 간 성추행 사건이었다는 비본질적인 정보를 계속하여 언급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남자가 남자 ○○○ ○○○ 괜찮다? 나라 망신시킨 외교부>(7월30일 노석조 기자)에서 동성 간 성추행 사건이라는 정보와 피해사실을 명시한 데 이어 가해행위를 유추할 수 있는 불필요한 삽화까지 포함했죠. 물론 해당 기사는 “일이 이렇게 커진 데는 외교부가 이번 성추행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뉴질랜드는 2005년 동성애 커플에게도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2013년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나라”라며 한국 외교부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아주경제는 <뉴질랜드 외교관, 도대체 무슨 일 저질렀길래? 피해남성 두 차례 당해>(7월29일 전기연 기자)에서 ‘피해남성’에 초점을 맞춘 제목으로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더팩트는 <“동성애자도 아닌 내가 뉴질랜드 백인 남 성추행?”>(7월29일 박재우 기자)에서 가해자의 입장을 부각해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한국경제 <외교부 “뉴질랜드 동성 성추행 의혹 남외교관, 보호 안 해”>(7월28일 강경주 기자)는 고유명사처럼 ‘뉴질랜드 동성 성추행’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반면 중앙일보 <외교관도 추문 낸 ‘동성 성추행’… 법원 이구동성 “사회상 변해”>(7월31일 이수정 기자)는 동성 성추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 비교적 짜임새 있는 기사를 선보였습니다. “과거에는 같은 성별 사이의 신체 접촉을 ‘장난’ 또는 ‘친근감의 표시’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동성 성추행에 대한 최근 법원 판결을 분석했습니다.
언론의 보도태도가 먼저 바뀌어야 독자의 기사소비 방식도, 성범죄에 대한 사회인식도 바뀔 수 있습니다. 언론이 성범죄 근절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 성범죄보도 가이드라인만은 지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에 충실한 기사 제목으로 바꾸는 일부터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 모니터 보고서에서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선정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대로 전달한 문구는 ○○○○○로 ‘블러처리’함.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20/8/5~2020/8/6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지면 보도, 네이버에서 ‘뉴질랜드 성추행’을 검색하여 나온 온라인 기사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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