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에 달한 언론 내부 젠더이슈 논쟁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박재동 화백 등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싸고 몇몇 언론사들에서 ‘기획미투’ 의혹 보도가 나오면서 편집국 내부 갈등으로 격화하고 있다. 당초 성폭력 보도준칙을 비롯한 저널리즘 가이드라인에 충실했다면 나오지 않았을 보도란 지적이 각 편집국과 학계에서 나온다. 언론사 조직 내 성인지 감수성 격차로 인한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다는 진단이 나온다.
일간지들이 자사 2차가해성 보도로 내홍을 겪고 있다. 한겨레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 발인일인 지난달 13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고 박 시장 추모 기고를 실었는데 공적 위주였다. 경향신문은 강진구 기자가 박재동 화백 성폭력 가해자 옹호단체 보도자료를 받아써 ‘기획미투’ 의혹을 제기했다가 기사가 삭제됐다. 서울신문은 지난 6일 곽병찬 논설고문이 박원순 시장 성추행을 고발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가해 칼럼을 냈다.
편집국 구성원 대다수가 비판 목소리를 냈다. 서울신문은 저연차 50~52기수 기자들과 편집국장, 부국장, 차장, 팀장을 비롯한 데스크급 구성원이 비판 입장글을 냈다. 한겨레는 지난달 15일 10년차 이하 기자들이 편집국 고위직과 소통하기 위해 꾸린 ‘레드위원회’에서 국장단과 회의를 열고 기고에 의견을 냈다. 경향신문 편집국 구성원은 독립언론실천위원회를 열어 사태 규명과 피해자 사과, 재발방지책을 요구해 경위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편집국 구성원과 학계, 여성인권단체 “저널리즘 원칙 어겨”
편집국 구성원과 학계, 여성인권단체는 이들 보도가 보도준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류지영 한국기자협회 서울신문지회장은 “편집국은 성범죄 보도준칙 피해자 관점에서 보도한다는 합의가 있는데, 피해자의 핸드폰을 포렌식하자는 등 적나라한 2차 가해 주장이 논설고문 칼럼으로 나온 데 깜짝 놀랐다”며 “적어도 80~90%가 칼럼이 게재돼선 안 됐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고 했다. 경향신문 소속 기자도 “편집국장과 데스크, 연차와 상관없이 모든 구성원이 상태 심각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이들 보도가 공통으로 “사건의 실체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박 시장 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길 바란다고 밝혔지만 경찰과 검찰은 별다른 수사 움직임이 없다. 권김현영 연구활동가는 “기자 질문이 수사기관을 향해야 하는 상황에 오히려 피해자와 대리인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박재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법원(1심) 판단이 끝났는데 법정에 제출된 증거를 가지고 의혹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들 보도는 편집국 내 데스킹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서울신문 논설고문 칼럼은 편집국 반대를 무릅쓰고 게재됐다. 이후 편집국이 게재 철회를 요구했지만 일부 표현만 삭제됐다. 경향신문 기사는 편집국 보고를 거치지 않고 미승인 송고돼 4시간 만에 삭제됐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기고의 경우 국·부장 합의를 거쳤지만 조 교육감 쪽의 요청으로 성사됐고, 게재는 ‘소통젠더데스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일어났다.
기자들 “세대만의 문제 아냐” 젠더·취재경험 등 복합 작용한 듯
보도 경위를 보면 모두 언론사 내 고연차 혹은 고위인사 통로를 통해 게재됐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경향신문 기자의 경우 편집국장급 기수로, 사실상 대다수 구성원이 ‘후배’다. 곽병찬 논설고문도 마찬가지다. 조 교육감의 기고는 오피니언 데스크를 통해 투고 요청이 이뤄졌다.
데스킹 과정뿐 아니라 보도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본 기자들을 세대나 연차만으로 가르기 어렵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의 경우 특히 데스크급과 고연차를 비롯한 절대 다수가 2차가해 보도를 규탄했다. 10년 미만 연차인 한 한겨레 소속 기자는 “‘레드위원회’로 토론회를 열었기에 15년차 미만 기자들의 목소리가 적극 나오긴 했지만 대다수 구성원이 문제의식을 공유했다”며 “오히려 이 문제를 세대를 앞장세워 풀려 하면 ‘저연차들이라 하는 말’이란 식으로 치부돼 유의미한 해석이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성별이 박 시장 또는 박 화백의 성폭력 사건을 보는 시각을 갈랐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한겨레와 서울신문, 경향신문 저연차 기자 5명은 “성별과 상관 없이 다수 구성원이 보도에 문제점을 인식했다”고 했다. 반면 한겨레의 이정연 소통젠더데스크는 “박 시장이 숨지고 혼란하던 당시, 가해자를 감싸는 보도를 해도 되는지를 두고 여성 기자들이 더 단호한 판단을 했다”고 했다.
현장 기자들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편집국 내 인식 차에 다양한 분석을 내놨다. 다수가 ‘성폭력 사건과 고발 움직임을 현장에서 취재해온 기자들일수록 젠더 감수성이 민감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한 서울신문 기자는 “저연차라서가 아니라 사회부 기자들이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을 수 있다. 현장에서 2015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부터 시작해 성폭력 피해자들과 여성인권단체 움직임을 취재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기자는 “젊은 세대 기자들은 곽 고문의 칼럼을 보고 인권 이슈로 여기는데, 고연차 언론인은 정치권과 정략의 이슈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고도 했다. 이정연 소통젠더데스크도 “박 시장의 죽음이 연차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충격이었지만, 특히 일선에서 취재해온 기자들이 끊이지 않는 성착취 범죄를 취재하면서 더 피해자 관점에서 보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판단했다”고 했다.
권김현영 연구활동가도 성폭력 문제를 다룰 때 ‘그를 둘러싼 사람이 누구인가’가 판단에 직접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권김 연구활동가는 “피해자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가해자에 이입하는 행위 칼럼들을 통해, 그들을 둘러싼 주류 남성의 전형적인 특성이 드러난 셈”이라고 말했다.
언론사 내부 성인지 감수성의 인식차 해결 방안이 있을까. 학계와 현장 기자들은 인식차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인식 차 드러낸 계기… 언론사 내 교육도 필요
최이숙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론사 내부에서 성인지감수성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편집국 내부에 합의됐던 저널리즘 원칙에 반대된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자 사회가 이를 드러내놓고 고민과 성찰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언론사 차원에서 젠더 이슈 관련 저널리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향신문 편집국의 한 구성원은 독립언론실천위원회 회의를 통해 편집국 차원에서 여성주의 학자나 법학자를 초빙해 교육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정연 젠더데스크는 “이 문제는 하나의 원인을 파악해 해결책을 내는 차원이 아니기에 막막하고 어렵기도 하다”며 “다행스러운 건 논쟁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논의 과정에서 내부 구성원이 상처나 2차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각자의 스피커만 가지고 주장하기보다 조직 내에 테이블 위에서 의견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겨레는 ‘레드위원회’ 토론회를 통해 성폭력범죄보도 세부권고기준에 의거 2차가해성 보도에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감 폭을 넓혔다. 이후 투고된 외부필진 칼럼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편집국장단 주도 아래 검토한 뒤 기고를 싣지 않기로 결정한 사례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