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고용보험한다는데 근심만 쌓여가는 문화예술인들
오는 12월 ‘예술인 고용보험’ 시행을 앞두고 문화예술 노동 현장의 근심이 깊다. 계약서 작성이 가입 조건이지만 불공정 계약이 만연한 현장엔 계약을 피하는 정서가 깊어 정부 대책이 병행돼야 한다는 평가다. 특히 문화예술계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조항 때문에 시작부터 사각지대를 낳는다는 우려도 크다.
문화예술노동연대(대표 안명희)는 21일 오후 2시 서울 당산동 ‘경험과 상상’ 극장에서 9차 예술노동포럼을 열고 10개 문화예술 분야의 계약 관계 및 문제 현황 실태를 발표했다. 문화예술노동연대는 게임개발자연대, 공연예술인노조,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웹툰노조준비위 등 12개 문화예술 단체가 모인 연대기구다.
10개 분야 공통점은 불공정 계약이다. 문화·예술노동을 제공하는 ‘을’ 지위의 당사자는 불리한 조건을 알면서도 수입을 벌기 위해선 사업주와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 10개 분야는 게임개발, 공연예술, 무용, 어린이·청소년책 작가, 웹툰 제작, 방송작가, 출판, 영화 스태프, 예술강사, 연기자 등이다.
표준계약서는 “그림의 떡”이다. 2011년 연기자 출연료 체불 문제가 심각히 대두돼 유관 기관과 협회, 방송연기자노조 등이 2여년간 머리를 맞댔고 2013년 표준계약서를 마련했다. 계약서엔 방송사·제작사의 의무와 연기자의 의무가 모두 열서너 개로 비등하다. 그러나 주우 방송연기자 노조 사무국장은 “지금까지 표준계약서를 쓰는 곳은 단 한 군데도 보지 못했다. 대부분 방송사·제작사 의무는 서너 개일 뿐, 연기자 의무는 열대여섯 개로 더 많아진다”고 밝혔다.
게임개발 쪽 불공정 계약도 심각하다. 갑(발주사)의 불만족을 이유로 일방 해지할 수 있는 계약이 흔히 발견된다. 대부분 ‘용역계약’이 이뤄지는데 계약 기간조차 갑의 발주에 맞춰 기간이 정해지지 않거나 장기간인 경우가 태반이다. 달리 말하면 을은 자신의 한 달 수입을 예상하기 어렵다. 구두 계약도 허다하다.
한 달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이들은 예술인 고용보험에선 배제됐다. 개정 고용보험법이 ‘예술인’ 개념을 예술인복지법에 따른 결과, 산업 발전에 따른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 종사자를 포괄하지 못한다. 분야는 문학, 미술, 사진, 건축, 무용, 음악, 국악, 연극, 영화, 연예, 만화 등이다. 게임업계에도 작곡 및 연주, 음향 기술자, 성우 및 보컬, 시나리오 작가, 그래픽 및 일러스트 관련 종사자 등이 있으나 현행법상 예술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게임개발자연대의 김환민 대표는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데다 게임 산업은 예술로 지정되지 않아 게임 산업에서 행한 용역은 예술용역으로도 인정받을 수 없다”며 “독소조항 없는 투명한 표준계약서를 제도적으로 도입할 것을 정부에 계속 요구 중”이라고 밝혔다.
'무늬만 프리랜서' 보도국 작가·출판노동자 등도 안전망 배제
방송작가도 사각지대에 처했다. ‘연예’ 분야가 아닌 취재작가, 보도국 작가 등이 보험 가입 대상에서 배제됐다. 이들 대부분은 전속성과 업무 지휘·감독 관계가 뚜렷해 노동자성이 인정될 여지가 큰 직군이다. 방송사와 근로계약을 맺어도 무방한 이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다.
고용보험 대상 작가라 하더라도 계약서 미작성 관행이 걸림돌이다.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부지부장은 “지난해 4월 노조 실태 조사 결과 ‘구두계약’으로 일한 작가들이 580여명 중 434명(74.8%)을 차지했다”며 “‘표준계약서’를 쓴다 해도 큰 실익이 없거나 표준계약서가 빌미가 돼 해고가 정당화되는 사례까지 있다”고 밝혔다.
표준계약서가 실익이 없는 이유는 계약서가 방송작가의 노동을 다 포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약서는 ‘집필 활동’만 계약 대상으로 다뤘다. 그러나 방송작가 대부분은 사전 취재, 인터뷰, 현장 답사 등 다양한 사전 업무부터 주차증 관리 등 추가 업무까지 맡고 있다. 김 부지부장은 “방송사, 외주제작사 등에 근로계약과 관련한 페널티를 부과해 계약 체결 강제성을 띄어야 한다”며 “방송작가에게 실익이 되는 표준계약서도 새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인 고용보험이 ‘예술노동’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한다는 말은 무용, 국악, 미술 등 일반 예술분야에서도 팽배하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의 박성혜 운영위원은 “연습은 물론, 분장이나 의상 점검 등의 준비과정, 리허설까지, 몇 분의 공연이지만 소비되는 시간이 더 많은 경우가 허다하다”며 “단순 3분짜리 공연이어도 공연자는 그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투여하는 것이 공연예술의 특징이다. 연습, 준비, 이동, 리서치 등 과정도 계약 관계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연예술계의 계약서 미작성 관행은 뿌리깊다. 지인을 통해 프로젝트 그룹을 구성해 일하는 사례가 많다. “아는 사람끼리 무슨 계약이냐”는 정서가 팽배하고, 어려운 처지에 서로 품앗이로 공연을 돕는 경우도 흔하다.
구은서 공연예술인노조 사무국장은 “공연 전뿐만 아니라 공연 뒤에도 정산과 아카이빙, 차후 공연 준비 등의 할 일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프로젝트 계약 특성상 사후처리 비중은 대폭 축소된 채 제작이 이뤄진다”며 “이처럼 계약기간을 산정하기 어렵고, 다단계 계약 구조로 고용주 지정이 모호하며, 구두계약 관행으로 고용보험 적용 대상자를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고용보험 제도의 소득기준 설정도 논란이다. 정부가 50만원 미만의 계약 건은 고용보험 제외 대상으로 둔다는 말이 나오면서다. 기간이 장기화되는 프로젝트가 적지 않을뿐더러 금액 자체가 적기에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용직 등 겸업을 하는 경우도 많다. 2018년 문체부 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예술인이 한 해 예술활동으로 버는 수입 평균이 1281만원(한 달 106만원 꼴), 중앙값은 300만원이었다. 수입이 없거나 500만원 미만인 예술인이 전체 56%를 차지했다. 이들은 한 달 41만원 미만을 예술 노동에서 번다.
문화예술노동연대는 정부가 대표적인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예술 노동자들의 최저 생계를 보호하려면 “한 달 동안의 계약을 모두 합산한 ‘월 총액 50만원 미만’을 적용 제외 소득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판노동자들은 게임업계와 마찬가지로 가장 넓은 사각지대에 처했다고 호소한다. 이들도 예술인복지법상 예술인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동시에 출판노동자 상당수가 법적인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프리랜서다. 외주 편집자, 외주 디자이너 외주 마케터 등이다. 번역가, 일러스트레이터 등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 처한 ‘하청노동자’에 처했다.
안명희 대표(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조합원)는 “출판노동자를 예술인 범위 안에 넣어 고용보험을 적용받도록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며 “작가가 아닌 출판노동자를 위한 표준계약서는 전무하다. 이들을 위한 표준계약서를 마련하도록 문체부를 압박해야 하고, 권리를 중심으로 내실있는 조항이 만들어지도록 싸워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