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재계 관계자는 누구인가
삼성이 우호적 여론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언론을 관리해왔는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공소장에 구체적 정황이 담겼다.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을 가능하게 했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전 집행한 광고비만 나흘 동안 36억원에 달했는데 2015년 7월 삼성물산 주주총회를 전후로 우호적 보도가 쏟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기업이 비판적 기능을 가진 언론을 무력화하는 일이 새삼 확인된 셈이다.
구체적으로 삼성은 합병을 반대했던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에 대한 비판을 극대화하기 위해 ‘외국 자본의 개입’이라는 프레임을 언론에 끊임없이 주입했다. 일류 국내 기업이 외국 자본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는 주장을 확산시키려 했고, 그 결과 엘리엇을 투기성 먹튀 펀드라고 비난하는 등의 언론 보도가 나왔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5년 6월17일 삼성은 ‘엘리엇은 경영권을 위협하는 해외 투기세력’이라는 주장을 담은 기고문을 작성해 노대래 전 공정거래위원장에 전했고, 해당 기고문은 동아일보에 인터뷰 형태로 보도됐다.
공소장이 공개(11일)되기 전 지난 1일 검찰이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시세조종행위 등 혐의로 이 부회장과 전현직 삼성 임원 등 11명을 불구속 기소할 시점에도 언론은 ‘엘리엇’을 등장시켰다. 이 부회장 변호인단이 입장문을 통해 “수사팀이 구성한 공소사실은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했던 투기펀드 엘리엇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 중재 재판에서 주장한 내용과 동일하다”고 밝히자 기다렸다는 듯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간 분쟁(ISD)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언론 보도를 분석해보면, 이재용 사건이 ISD 소송에 영향을 미쳐 국부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시작해 “검찰 수사팀이 주장하는 의혹이 엘리엇 논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재계 관계자의 우려 섞인 목소리를 담았다. 이어 이재용 부회장 사건이 ISD 소송에서 엘리엇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한 외신 보도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통신사부터 인터넷 매체까지 ‘ISD소송 전망→검찰 기소는 위험→재계 관계자 우려→외신 인용’ 수순으로 보도하는 형식이 판박이다.
특히 해당 보도들은 3개월 전과 거의 유사한 형식과 내용으로 이미 다수의 매체들이 다뤘던 내용이다. 한 매체는 지난 6월22일 보도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간 분쟁(ISD)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6월에 나온 보도와 9월 1~2일자 보도를 비교하면 이재용 부회장이 검찰수사심의위 결과를 앞두고 있었다는 점과 이 부회장이 불구속 기소됐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심지어 인용한 재계 관계자 발언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 6월22일 이데일리는 “이 부회장에 대한 기소는 ISD 소송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이는 8000억원 규모의 국부 유출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재계 관계자 발언을 인용했는데 9월 1일 뉴시스 보도에는 “이 부회장에 대한 기소는 ISD 소송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이는 조 단위에 육박하는 국부 유출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재계 관계자 발언이 나온다.
검찰 수사로 인해 이재용 부회장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삼성을 대변하는, 누군지 모를 재계 관계자 발언을 되풀이 보도하는 것을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쯤 되면 국부 유출을 운운할 게 아니라 이재용 부회장 신변을 지키고 싶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