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나훈아로 文비판이라면 나훈아도 정쟁 수단?
가히 신드롬으로 부를 만하다. 지난달 30일 KBS 2TV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전국 시청률 29%(닐슨코리아 집계)를 기록했다. 나훈아라는 브랜드 가치를 입증하고 남을 수치다. KBS는 3일 오후 비하인드 영상까지 담은 재방송을 긴급편성했다. 나훈아를 소비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누리꾼들은 40여년 전 나훈아·남진의 라이벌 구도를 재조명하며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다. 나훈아 신곡 ‘테스형!’의 유튜브 조회수는 138만회를 돌파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나훈아 노래만큼이나 ‘발언’에 의미를 부여했다. 나훈아는 KBS를 언급하며 “우리 KBS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소리를 듣고 같은 소리를 내는, 이것저것 눈치 안 보고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 기대하십시오. KBS 거듭날 겁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 “저는 옛날의 역사책을 보든 제가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고 했다.
대통령과 위정자를 언급한 발언에 정치권이 호응했다. 대표적으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는 나훈아 발언을 인용하며 “국민의힘으로 목숨을 걸고 이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했다. 같은 당 조수진 의원은 “두고 보세요. KBS, 거듭날 겁니다”라는 발언을 인용한 뒤 “상처받은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나훈아씨에게 갈채를 보내다”라고 적었다.
언론은 ‘대통령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데일리안은 3일 오전 충청권 추석 민심을 소개하는 기사 제목을 “‘문대통령보다 나훈아 한마디에 더 큰 위로 받았다’”로 뽑았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 발언을 인용했다.
정 의원은 데일리안과 통화에서 “‘우리 해수부 공무원이 북한에 의해 총기난사를 당해 살해당한 사건에 정부가 왜 그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느냐’, ‘왜 그렇게 북한 눈치 보기에 혈안이 돼 있느냐’, ‘우리 국민의 목숨값이 그렇게 하찮느냐’는 얘기들을 많이 하셨다”며 “‘대통령의 한마디보다도 가수 나훈아 씨의 한마디에 더 큰 용기와 위로를 받았다’고 하시더라”고 했다.
이 매체 지난 2일자 칼럼 제목도 “유시민과 친문 패거리가 망치는 나라, 나훈아·김부선이 살리고 있다”였다. 자유기고가 정기수씨는 이 칼럼에서 “트로트 황제 70대 가수 나훈아의 당당한 삶에 비하면 60이 넘도록 아부나 편가르기, 자기 편 감싸기 발언이나 일삼으며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는 같은 경상도 출신 전 의원이자 전 장관 유시민의 삶이 얼마나 비루한가”라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비판했다.
석민 매일신문 디지털국 부국장은 3일 칼럼에서 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북한 피격으로 사망한 공무원 사건에 사과한 것을 언급하며 “‘가요계의 황제’ 나훈아씨의 멘트에서는 대통령의 사과 말씀에 별로 감읍한 느낌이 없다. ‘역사책에서도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은 한 사람도 본 적 없다. 나라를 지킨 건 바로 여러분이다’라는 말의 속내를 한 번 분석해보자”고 했다. 나훈아의 KBS 콘서트 녹화는 지난달 23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됐고 언론에 공무원 피격 소식이 본격 알려진 것은 지난달 24일이라는 점에서 나훈아 발언과 공무원 피격 사건을 직접 연결하는 건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은 “나훈아씨가 TV 공연 중 ‘왕이나 대통령들이 백성과 국민을 위해 목숨 거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한 말을 두고 ‘文대통령을 비판한 것’이라거나 ‘文대통령보다 나훈아로부터 더 큰 위로를 받았다’는 둥 나훈아씨의 말을 아전인수식으로 떠들기 바쁘다”며 “감사한 말을 ‘정치’가 아닌 ‘정쟁’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정치인들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놀랍다”고 꼬집었다. 최영일 시사평론가는 2일 KBS 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에서 “(정치권은) ‘신드롬’이 일어나면 항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곤 한다”며 “(나훈아 발언은) 우리 국민은 1등 국민이다, 왜 국민에 대한 격려를 정부 비판으로 해석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나훈아는 소신 있는 가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사전행사로 열린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에 나훈아의 참여를 원했으나 그는 불참했다. 당시 ‘일정이 있다’는 게 이유였지만 예술가로서 그의 반골 기질을 고려하면, 간섭과 동원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게 아닐까 유추할 수 있다.
또 2010년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 파티에는 연예인, 클래식 연주자, 패션 모델들이 초청됐는데 가수의 경우 2~3곡을 부르고 30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이를 거절하는 가수는 거의 없지만 나훈아는 예외였다. 그는 “나는 대중 예술가다.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는 취지로 거부했다고 한다. 나훈아가 정쟁 소재로 소모되기 아까운 예인(藝人)인 것은 분명하다. 상투적 말을 ‘소신 발언’으로 포장해 진영의 무기로 삼기엔, 주옥 같은 나훈아 노래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