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개드립이 웃긴 이유
https://www.dogdrip.net/274885436
기울인글은 개드립 글 복사한것
1. 이완용은 여색도 사치도 거의 없는 본투 씹선비of씹선비였다.
->여색과 사치? 여색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이완용은 치부에는 엄청 공을 들인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한 바로 이완용 재산은 당시 300만원 현재 가치 450억 가량 된다.
물론 이런 환산은 정확하지 않으므로 확실한 예시를 들자면 이완용일가가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완용 아들 이항구는 술취한채로 자동차 타다 어린아이 다리 분질러 놓고는 아무 사죄도 배상도 안했던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이완용은 부동산 투기를 통해 돈을 엄청 번 인물이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345387&plink=ORI&cooper=NAVER)
사치를 안했다고?
아래사진은 ㅈ무위키에만 쳐도 나오는 이완용 자택의 모습이다.
2.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닌 친미파였다.
일본어도 잘 못해서 통역을 대리고 다녔고 청에서 벗어난 후 독립협회 협회장이 되자 독립문 준공현장에서 아래와 같은 연설을 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은 미국인같이 되기를 바란다.
->이완용은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었다.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친일파건 친미파건 기회주의자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가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것이 무슨상관인가?
결국 나라를 일제에 팔아먹은건 사실인데
3. 실제로 이완용은 학부대신에 임명되자마자(현대의 교육부장관격) '소학교령'을 선포하고 조선 최초의 의무교육을 시행했다.
유교국가의 목적은 백성을 교육하고 덕을 함향하는것인데
이완용이 의무교육을 강제화 할때까지 조선 역사 500년동간 국가주도적으로 백성을 의무 교육 시키려한 인간이 없었다.
->세계 최초의 의무교육은 1819년 프러시아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역사 5백년간이 아니라 세계역사 몇 천년 동안 대부분의 국민이 교육을 받게 된지는 이제 겨우 2백년이 되어간다.
그전까지 교육은 부유하며 정치권력에 가까운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었던 특권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유일하게 성공한 일본의 경우도 1872년에 의무 교육제도를 제정, 1900년에 의무 교육이 시작되었다.
72년에 제정해도 교사육성, 학교건립 등 인프라적 요소를 확충하기 위해 오랜시간이 걸린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보다 우월한 요소(경제적, 사회적)를 가진 일본도 20여년이 걸린 것이다.
4. 고종은 현실감각이 없는 군주였고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열강을 향해
조선식 '덕'을 교육하면 어떻게 잘 될줄 아는 그런 인간이었다.
자기 백성의 교육조차 신경쓰지 않던 황제의 판단은 그러했고
그래서 헤이그에 특사를보냈다.
결과는 문전박대를 당해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이를 대외적 적대행위로 판단한다.
결국 이를 명분 삼아 선전포고 카드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수순까지 오자
고종에게 남은 선택지는 선전포고를 받아들이고 전쟁을 준비하느냐,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하느냐 둘 뿐이었다.
-> 고종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인 위 3줄은 빼자. 헤이그 특사에 대한 평가도 뺴자. 맨 마지막 3줄을 보자. 일제가 선전포고 카드를 만지작?
헤이그 특사를 보내기 전 조선은 이미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에 묶인 상태였으며 일제는 굳이 전쟁이라는 선택지를 꺼낼필요도 없는 상태였다.
실제로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 대한제국 군대를 매우 수월하게 해산했다.
또한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치권력을 일제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파견은 그것의 성공, 실패 여부를 떠나 그러한 방법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5. 결국 행위의 따르는 책임은 전제 군주가 져야만 했다.
하지만 고종은 그 의무를 끝내 거부하여 대신들에게 전가했고
실제 '알아서 협의하라' 명령했다.
백성을 구하자고 전쟁을 막으면 황실을 지키지 못한 역적 가문이 되는 것이고
싸우자고 주장하면 질게 뻔한 상황에서 전후 책임을 떠앉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 비겁함에 혀를 내두르며 침묵했으나
이완용만이 자진해서 서명을 받아내 나라를 진짜 양도해버린다.
그렇게 체결된 정미7조약은 외교권을 통감부에게 넘겼던 을사조약을 넘어 내정권까지 양도한 실질적 매국이었다.
이후 군대까지 해산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완용의 수완덕에 고종은 목숨을 보전하는걸 넘어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왕실에 병합하는 조건으로 일본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재산도 온전히 보전하게 된다.
이완용은 고종을 위한 희생양이자 은인이었다.
이 때문에 고종은 평생 이완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아꼈다.
이완용덕에 순종의 아들 의천왕은 이토히로부미가 역정을 낼정도로 일본 유학생활 내내 돈을 물쓰듯 쓰며 사치를 즐길 수 있었다.
-> 정미7조약은 1907년 7월 24일, 고종은 1907년 7월 20일에 순종에게 양위해서 이미 황제가 아니다.
또한 이완용이 아니어도 고종은 목숨을 잘 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종이나 이완용의 능력 여부를 떠나서 조선이라는 일본의 1/3 정도 되는 거대한 국가를 집어삼키려면 굳이 피지배층인 조선인들을 자극할 요소, 예를 들면 고종을 죽인다거나 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딱히 이완용이 없더라도 고종은 경제적으로 잘먹고 잘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6. 팔도의 유생들은 내부 사정을 알지 못했다.
전제 군주 국가에서 군주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왕은 끝내 거부했지만 이완용을 필두로한 을사오적이 왕을 능멸하여 나라를 양도했다 믿었다.
이들의 상소문만 보고 대한매일신보 등이 내용을 확정지어 보도했다.
고종은 끝까지 침묵했다.
고종의 퇴위를 이유로 민중들이 이완용의 집을 불태우자
고종은 '그같은 자가(충신) 집이 없어서는 안된다'며 이완용에게 저동에 있는 왕실 소유의 저택을 양도하기까지 했다.
매일같이 이완용을 죽여달라 상소문을 올려대던 유생들은
그야말로 이게 무슨 짓인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나 진실을 알리가 없었다.
이완용이 암살 미수를 당할때마다 고종은 위로금과 술을 보냈고
순종은 이완용의 사직서를 반려하기까지 했다.
->고종은 을사조약을 최대한 반대했다.
어전회의에서 조약체결을 강요하는 이토가 알현을 청하자 거부하기 위해 인후염을 핑계로 자리를 떠났을 뿐 아니라 회의를 중지시키기 위해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이토에게 보냈는데, 이재극이 도중에 일본군에게 감금당하고 박제순이 도장을 찍으면서 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고종은 무능했어도 을사조약이 나라팔아먹는 조약인건 알고 있었고 회피했다. 그것이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는지는 떠나서 을사조약을 반대하긴 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가 칼빵놓기 전까지 암살 시도를 겪어본적이 없으며 이후로 자기 조카에게 폭행당한 사건 외에 신체적으로 위협당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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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조선말은 별 희망도 없는 상태고 어느나라의 식민지화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고 본다. 근데 그렇다고 나라팔아먹은게 자랑은 아니자나?
글쓴이는 이완용도 병신 고종도 병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라 이야기 하지만
결국 이완용은 왕조에 충성한 인물, 근대적 사고방식이 가능했던 유일무이한 인물 정도로 포장하고 있어서 좆같고 역겹다.
그리고 글쓴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일뽕들이 근래에 들고오는 이야기가 이패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