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서로 말 안 하게 된 썰.txt (장문, 자작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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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서로 말 안 하게 된 썰.txt (장문, 자작주의)

필사모 0 339
두 달 전쯤에 아버지와 감정적으로 크게 틀어진 일이 있었다. 그 날은 아버지가 집에서 쫓겨난 지 닷새 만에 집으로 돌아오신 날이었다. 아버지의 때늦은 귀가에도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집 안에는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그런 상태로 사흘 밤을 보냈을 때 아버지가 느닷없이 내 방문을 벌컥 여셨다. 그때 아버지가 내게 건넨 첫 마디는 이런 것이었다. 
"네가 아버지를 이해를 좀 해라. 네가 이렇게 나오면 우리 집 망한다." 
아버지가 사흘 동안 생각해낸 말은 마치 협박 같은 것이었다. 너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는 협박.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딴 말 할 거면 내 방에서 나가라고 쏘아붙이고는 아버지를 몰아냈다. 부자간의 대화는 그때부터 끊기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이 글은 내가 어쩌다가 이런 아들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아들이 되기까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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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아버지 때문에 마음 속 상처들을 하나씩은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 우리 집의 첫째인 누나는 그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독립하여 살고 있는 사람이다. 
 
누나는 어릴 적부터 영특한 아이였다. 중학교를 다닐 적엔 외고 준비를 할 정도의 수재였다. 글쓰기와 문학 같은 언어적인 재능이 뛰어났고 특히 중국어를 잘해 외고도 그쪽으로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외고 진학이 뜻대로 되지 않아 일반계 고등학교를 가게 됐고, 어릴 적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던 누나는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준비해야 하는 각종 공부들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좋아하던 글쓰기나 중국 영화에 심취해 살았고, 그렇게 성적은 조금씩 떨어졌고, 아버지는 이를 보면서 불편한 심기를 자주 드러냈다. 그때부터 누나는 종종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회초리질을 당하거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는 소리를 내던 누나의 모습을 종종 목격하곤 하였다. 
 
그 뒤로도 성적이 떨어진다고 누나가 목숨처럼 아끼던 중국 영화 비디오를 뺏어간다거나, 누나가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는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을 결심하자 상경 전날 저녁 자리에서 누나에게 일절 말 한 마디 걸어주지 않는 모습으로 아버지는 종종 누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누나가 직장인이 됐을 때,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퇴근길에서 심한 말다툼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내게 무슨 말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누나는 아버지가 던진 어떤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퇴근길 내내 누나는 아버지 옆자리에서 울었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 방문을 열고는 
“야, 니도 살고 싶으면 이 집구석 나가라. 여기 완전 사람 죽이는 집안이다.” 
라고 소리치더니 자기 방문을 걸어잠그고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원룸을 구해 집을 나갔다. 
 
 
 
 
 
 
이런 누나보다도 더 마음고생을 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식들과 위와 같은 갈등을 빚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당신이 애들을 저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애들을 왜 저렇게 교육시키느냐.” 와 같은 말들을 들으셔야 했다. 물론 아버지 세대의 가부장적인 가장들이라면 그런 말들이 예삿일이었다고 하지만, 문제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돈 문제로 어머니의 마음을 어그러뜨렸다. 한 사람의 마음을 먼지더미로 폭삭 주저앉게 만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기본적으로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딱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미나리를 팔고 있는 어르신들이 있으면 꼭 한 단씩을 사오는 유형의 인간, 주변의 어려운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돈을 빌려주는 인간이었다. 
 
허나 문제는 그 돈이 자기 돈이 아닐 때가 많았고, 어머니가 가족들을 위해 모아오신 돈에도 종종 손을 댔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은행에 맡겨둔 예금까지 몰래 빼돌린 적도 있으셨다. 어머니는 은행원에게 그 사실을 확인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기절까지 하셨지만 아버지의 씀씀이는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아버지가 친구에게 보증을 서주고 집에 1억이 넘는 빚이 생기고 나서야 그 씀씀이가 멈추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어머니의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난 이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내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면 “왜 애 앞에서 돈 얘기를 해서 아버지를 나쁜 사람 만드느냐.”, “이놈의 여편네가 정말 성질이 더럽다.” 따위의 말들을 일삼곤 하셨다. 
 
 
 
이런 와중에도 어머니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10년째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형이었다. 형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는 상처에 유달리 민감했다. 어릴 적부터 성적 등의 이유로 자주 맞았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단둘이서 여행을 다니는 와중에도 성적으로 잔소리를 들으며 자란 탓이었다. 내가 형만 아버지와 여행을 다닌다고 부러워할 때 사실 형은 타지에서 자존감을 갉아먹는 말들을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자신에 비해 외고 준비를 할 정도로 뛰어난 누나를 보며 자신이 차별 당한다는 기분도 많이 느꼈고, 이런 것들이 쌓여 고등학생이 돼서는 아버지에게 거세게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자 아버지의 팔목을 잡고 회초리를 낚아채 집어던지는 모습까지 보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옆에서 저녁을 먹다 그 장면을 보고 그대로 얼어버린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러면서도 형은 학업에 대한 압박을 느꼈는지 꾸역꾸역 공부를 해내었다. 그래서 문과였던 형은 공학계열 학과에 교차지원을 할 정도의 성적까지 되었다. 다만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전혀 없었던 형은 부모님의 권유에 떠밀려 공학계열 학과에 진학했고, 그런 식으로 결정한 진학이었기에 대학 생활에는 전혀 적응을 하지 못했다. 알아듣기 힘든 공학 강의들이 너무 벅차 그만 손을 놔버렸고 대부분의 강의에 출석하지 않았다. 결국 1학년 2학기에 한 강의를 제외한 모든 강의에서 F를 맞은 학사경고장이 날아왔고 형은 곧바로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형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제대를 앞두고 복학을 준비해야 될 시기쯤이었다. 당시 형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나에게만큼은 천덕꾸러기에 장난도 잘 치는 형이었는데, 제대가 다가올수록 형은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휴가를 나와도 하루 종일 집에서 게임만 할 뿐 친구들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 그쯤부터 부모님은 형과 드문드문 복학에 관한 논의를 하였으나 형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제대를 하고도 한 달 가까이 이런 상황이 계속 됐다. 급기야 아버지는 형을 방으로 데리고 가 1시간이 다 되도록 일장 연설을 하셨다.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신을 차려야 된다, 대학 안 가고 뭐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등의 얘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얘기를 끝내고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셨을 때,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는 것만 같았다. 
 
그때 형 방에서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일순간 집에는 정적이 흘렀고 긴장감이 엄습했다.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쿵. 쿵. 쿵.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며 형의 방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방문은 굳게 잠긴 상태였다. 부모님은 계속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뭐하노? 문 좀 열어봐라.”
“할 얘기 있으면 나와서 해라. 지금 뭐하는 짓인데?”
“아아아아아아악!!!” 
그 때 형 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첫 비명소리에 부모님과 나는 모두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비명소리는 주먹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서너번째 비명소리 끝에는 형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실려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하던 소리가 아흐흑, 하고 변하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있었고, 부모님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다시 거실로 돌아오셨다. 
 
그 순간 형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형의 얼굴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눈물자국이 있었고 처음 보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살기 어린 눈빛은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형은 방에서 들고 나온 컵을 식탁에다 내팽개치고 끝까지 아버지를 노려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방문은 굳게 잠궈 놓은 채였다. 그때부터 형은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시작했다. 복학을 하지도 않았고, 휴대전화도 만들지 않았고, 식사도 가족들과 하지 않았으며, 외출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10년 넘게 이어갈 거라고는 가족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내가 대학에 가기 전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나라고 상처 하나 없이 자랐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 하나 없이 자랐다. 왜냐면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성에 찰 만큼 공부를 곧잘 하였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는데 그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였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며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겠다는 데 부모님과 갈등이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목청을 높여가며 싸울 때도, 누나가 회초리질을 당할 때도, 형이 아버지를 죽일 듯이 노려볼 때도, 그저 그 옆에서 묵묵히 공부를 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남들 다 겪은 사춘기도 안 겪는 애라고, 부모 속 한 번 썩이지 않는 아들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평탄하고 무난하게, 그렇게만 살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더욱 싫어했다. 왜 나만 저런 막말들을 피해갈까? 왜 어머니와 누나와 형만 피해를 볼까? 우리 가족들이 겪는 상처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만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 건 뭔가 이상했다. 상처를 줄 거면 나까지 줘야지, 왜 애꿎은 가족들에게만 그러는 건지. 물론 분명히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내가 침대에서 자고 있으면 벌써 고등학생에 수염까지 난 아들내미가 아직도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몸을 부비며 끌어안으시기도, 내가 원하는 대학에 줄줄이 낙방했을 때에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시기도 한 분이셨다. 내가 원하는 것에는 반대 없이 모든 걸 지원해주신 분이었다. 하지만 왜, 누나와 형한테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오신 어머니한테는 왜.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종종 그런 생각들에 몰두하곤 하였다. 그리고 나는 마땅히 나 역시도 아버지를 미워해야 한다는, 그것이 아버지의 잘못된 편애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나 내가 대학에서 그런 생각에나 빠져있을 때, 오히려 우리 가족은 화목해지고 있었다. 누나도 떠나고 나도 떠난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종의 해방감을 누리시는 것 같았다. 부모님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는 두 분이 나란히 찍으신 셀카가 자주 올라왔고, 그때 직장에 다니던 누나는 부모님께 자주 전화를 드리며 용돈도 따박따박 드리고 있었다. 가족의 품을 벗어나 바라본 우리 집은 마냥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어머니와 누나, 두 사람은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저질렀던 언행들을 모두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아버지를 싫어해야 할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는데, 그런 가족의 모습을 보자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커져만 갔다. 어떻게 저렇게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세상 행복한 듯 살아갈 수가 있나. 그리고 누나와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사람을 품어줄 수가 있나. 두 사람은 이미 실컷 미워하고 털어버린지 오래인데, 나만 뒤늦게 이러는 거 같아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내가 저 두 사람을 대신해서 아버지를 미워해야 된다고. 저 둘은 포기했지만 나는 끝까지 아버지를 미워할 거라고. 
 
아버지는 나의 그런 생각이 꺾이지 않도록 드문드문 예전처럼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셨다. 특히나 형에게 그랬다. 아버지는 은둔형 외톨이가 된 형을 이해하지 못했다. 몇 년째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는 형을 게임 중독자쯤으로 취급했고 늘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끔씩 집에 있는 인터넷 선을 강제로 뽑아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형은 격분해서 방에서 뛰쳐나와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고, 어머니는 그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매셨다. 상황이 수습이 안 되면 아버지는 경찰을 불렀다. 집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가 될 정도로 아버지와 형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린 상태였다. 어머니가 그 당시의 얘기를 해주시며 아직도 겁에 질린 표정을 한 것을 볼 때면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내가 그런 집구석을 떠나지 못하고 다시 본가로 들어와 살게 된 이유는 바로 그러한 어머니 때문이었다. 교사 임용 시험을 앞두고 어느 지역에서 살아야 될까를 고민할 때, 혼자서 쩔쩔 매고 계실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결국 대학에 간 지 6년 만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직장 생활의 첫 1년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어머니의 표정도 좋아보였고 아버지와도 크게 투닥거리지 않으셨다. 공동 명의로 되어 있던 모든 통장과 재산들이 어머니 명의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아버지가 함부로 돈을 빼가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평탄하고 무난하게, 그렇게만 살아가면 될 줄 알았다. 아버지가 집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사건의 발단은 아버지가 형의 컴퓨터를 건드린 것으로 시작됐다. 정년으로 직장에서 은퇴를 하시고 아버지는 줄곧 컴퓨터 앞에 앉아계셨다. 그러다보니 새 컴퓨터를 하나 장만하고 싶어 하셨는데, 마침 형이 쓰던 컴퓨터 본체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그 컴퓨터에 눈독을 들이셨다. 그래서 형이 물을 마시러 잠깐 부엌으로 나왔을 때 아버지가 형에게 물었다. 
“저기 고장 나서 베란다에 내놓은 컴퓨터 아빠가 좀 써도 되겠나?” 
그러나 형은 10년 동안 아버지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모든 말을 철저하게 무시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형의 물건에 손을 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버지 스스로가 잘 알 것이라고 믿었기에 여기서 상황이 끝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기어코 형의 본체를 가져갔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본체를 포맷시켜버렸다. 덕분에 형이 10년간 모아왔던 모든 자료들이 일순간에 날아가고 말았다. 
 
내가 그 일의 전모를 알게 된 것은 어느 토요일 새벽이었다. 주중의 피로를 풀려고 간만에 밤을 좀 새우면서 시간을 때울 영화를 찾던 중이었다. 그런데 무슨 소리가 들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밖에서 형이 부모님 방에 가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종종 어머니와는 대화를 하는 형이었기에 어머니와 할 얘기가 있나보다 하고 예삿일로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퍽하고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방에서 나와 보니 부모님 안방 문에 주먹질을 하여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한 홈이 움푹 파인 것이 보였다. 형은 방문 앞에서 피가 맺힌 주먹을 쥐고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니 왜 컴퓨터 함부로 가져갔는데.” 
형은 아버지에게 반말로 읊조렸다. 
“내가 언제 가져가라 그랬는데.” 
“아니,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아버지는 가져가도 되는 줄 안 거 아이가.” 
아버지의 대꾸에 형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데.”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왜 자꾸 내 인생 방해하냐고 진짜. 왜 그러냐고 대체. 왜. 왜!” 
그렇게 말하면서 형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떨구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상태로,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이 지났을 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미 지워진 거 어떡하겠는데. 네가 아버지 좀 이해를 해라.”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쳐다보았고 형도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뭐?” 
내가 어릴 적 보았던 살기가 되살아나는 것이 보였다. 
“니 뭐라 그랬는데 방금.” 
아버지는 아차 싶었던 건지, 아니면 아직도 무언가가 억울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닫고 계셨다. 형이 계속 쏘아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형을 제지했다. 
“좀만 진정하자. 엄마가 미안하다......”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아직도 피가 나고 있던 형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형도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내 방으로 데리고 와 방문을 잠궜다. 
 
도대체 왜 그러신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형에게 한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괜찮은 줄 알고 그랬다고. 10년간 아버지의 어떤 말에도 대꾸하지 않는 형의 모습이 눈 앞을 스치자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를 타일렀다. 
“아빠, 아무리 그래도 형은 지금 마음이 아픈 사람이잖아. 자기 자식이 아픈 상황이잖아. 그러면 아빠가 좀 배려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빠가 형 물건 건들면 형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뻔히 알면서 왜 배려를 못 해주는데.” 
그 말에 아버지도 조금은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때 문 밖에서 형 목소리가 들렸다. 
“야, 나와라.” 
형이 아버지를 계속해서 불러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지금 나가면 어떡할 거야. 뭐라고 그럴 거야 형한테.” 
내 질문에 아버지는 계속 입을 다무셨다. 나는 끝까지 아버지 대답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나오라고 이 씨발새끼야!” 
라고 소리치는 형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울먹이면서 빨리 문 좀 열어보라고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을 때, 형의 시선은 정확히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나오라고. 좋은 말 할 때.” 
형은 살기를 감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형의 팔을 붙들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 봐서라도 좀만 참아주면 안 되겠나.” 
그러더니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로 와서 지금 당장 집을 나가달라고 비셨다. 아버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두 분이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버지가 하면 안 되는 말을 했다. 
“당신이 이렇게 쩔쩔 매니까 애가 지금 즐기고 있는 거 아이가!” 
형이 그 말을 듣고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서 나는 본능적으로 형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형, 좀만 기다려봐. 내가 아빠하고 얘기해볼게. 형이 굳이 이렇게 화낼 필요 없으니까 내가 해볼게. 형 진짜 조금만 참아봐.” 
형은 내 말을 무시하고 아버지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어머니도 달려와 형을 막아섰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와 가까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형을 거실로 데려왔다. 그러자 형은 소파에 주저앉아 아무 말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아버지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계셨다. 형의 감정이 가라앉고, 형을 겨우 방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나는 아버지에게로 다가가 무릎을 꿇으며 손을 잡고 말했다. 
“제발 말 좀 그만하라고, 제발!” 
 
부모님과 나는 밖으로 나갔다. 셋이서 차에 타자마자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를 문책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어떻게 미안한 사람이 네가 이해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냐고. 아버지는 볼이 불룩해진 채로 이런저런 변명을 하셨으나 귀담아 들을만한 건 없었다. 결국 어머니와 나는 며칠만이라도 집에 들어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본인 소유의 땅에 텃밭을 가꾸고 계셨고, 그 텃밭에 컨테이너 박스까지 들여다 놓으셨으므로 나는 그곳에 며칠만 있으라고 부탁했다. 부탁을 하며 내가 말했다. 
“여태까지 아빠한테 미안해서 이런 부탁 못 했던 건데, 이제 내가 왜 미안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냥 며칠만 좀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지내줬으면 좋겠다.” 
그 말들 듣고서 아버지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어머니와 나를 내려놓으시고는 차를 몰아 집을 떠났다. 아버지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면서 우셨다. 
 
집에 돌아왔을 때 시간은 새벽 5시 30분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형이 벌컥 방에서 튀어나와 아버지는 어디 갔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내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는 혼자서 조용히 형을 진정시켰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안방 문을 보았을 때, 문에 움푹 파여 있던 홈이 나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평생 아버지를 미워하게 될 거라는 에감이 들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닷새를 밖에서 보내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사흘 밤을 말없이 지내셨고, 내게 처음 건넨 말이 네가 이해를 좀 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 때문에 제 자식이 자신에게 육두문자를 내뱉고, 아버지를 아버지 취급도 않는 모습을 보고서도 아버지는 네가 이해를 하라는 말 뿐이었다. 내 예감이 확신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나는 그 기분을 견딜 수 없어 아버지를 내쫓았다.
 
분명히 내가 아버지를 미워해야 할 명확한 이유는 없다. 아버지는 상처 하나 없이 나를 사랑하셨다. 심지어는 내가 운전면허가 없는 탓에 아버지는 1년 내내 나의 출퇴근길을 운전해주시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차를 얻어 타면서도 부끄럽게도 아버지를 싫어했다. 그렇게 나의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해주신 나의 아버지를 나는 감히 지금도 미워한다. 이런 나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차마 아버지를 혐오한다고, 증오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미워한다고만 말한다는 점이다. 나는 차마 아직까지도 다 말하지 못한 내 모든 가족사를 거쳐 오면서 아버지를 미워하게 됐고, 그러면서도 차마 혐오하거나 증오하지는 못하고 그저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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