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이 바라본 매국노 이완용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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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이 바라본 매국노 이완용이란?

필사모 0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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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 앞서 사상검증부터 하고 가겠다.

 

이완용 매국노 새끼

 

 

 

...

 

우선 이완용 평전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친일인명사전 작성에 참여했던 윤덕한 작가와(경향신문 편집국 기획취재부 부장 출신)

 

한겨례 출판에서 한겨례 역사인물평전 시리즈 집필에 참여했던 사학과 박사 출신의 김윤희 작가의 책이 있다.

 

 

이완용 평전이라 하면 극우 단체의 이념적 작전 내지는 이슈를 끌기 위한 이완용의 재평가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디까지나 이 책들은 이완용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있고 어떻게 매국노로 변해가는지에 대해 거슬러 짚는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평전의 공통적인 내용을 뽑아 풀자면

 

 

 

1. 이완용은 여색도 사치도 거의 없는 본투 씹선비of씹선비였다.

 

 

2.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닌 친미파였다.

 

일본어도 잘 못해서 통역을 대리고 다녔고 청에서 벗어난 후 독립협회 협회장이 되자 독립문 준공현장에서 아래와 같은 연설을 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은 미국인같이 되기를 바란다.

 

 

3. 실제로 이완용은 학부대신에 임명되자마자(현대의 교육부장관격) '소학교령'을 선포하고 조선 최초의 의무교육을 시행했다.

 

유교국가의 목적은 백성을 교육하고 덕을 함향하는것인데

 

이완용이 의무교육을 강제화 할때까지 조선 역사 500년동간 국가주도적으로 백성을 의무 교육 시키려한 인간이 없었다.

 

 

4. 고종은 현실감각이 없는 군주였고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열강을 향해

 

조선식 '덕'을 교육하면 어떻게 잘 될줄 아는 그런 인간이었다.

 

자기 백성의 교육조차 신경쓰지 않던 황제의 판단은 그러했고

 

그래서 헤이그에 특사를보냈다.

 

결과는 문전박대를 당해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이를 대외적 적대행위로 판단한다.

 

결국 이를 명분 삼아 선전포고 카드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수순까지 오자

 

고종에게 남은 선택지는 선전포고를 받아들이고 전쟁을 준비하느냐,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하느냐 둘 뿐이었다.

 

 

5. 결국 행위의 따르는 책임은 전제 군주가 져야만 했다.

 

하지만 고종은 그 의무를 끝내 거부하여 대신들에게 전가했고

 

실제 '알아서 협의하라' 명령했다.

 

백성을 구하자고 전쟁을 막으면 황실을 지키지 못한 역적 가문이 되는 것이고

 

싸우자고 주장하면 질게 뻔한 상황에서 전후 책임을 떠앉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 비겁함에 혀를 내두르며 침묵했으나

 

이완용만이 자진해서 서명을 받아내 나라를 진짜 양도해버린다.

 

그렇게 체결된 정미7조약은 외교권을 통감부에게 넘겼던 을사조약을 넘어 내정권까지 양도한 실질적 매국이었다.

 

이후 군대까지 해산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완용의 수완덕에 고종은 목숨을 보전하는걸 넘어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왕실에 병합하는 조건으로 일본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재산도 온전히 보전하게 된다.

 

이완용은 고종을 위한 희생양이자 은인이었다.

 

이 때문에 고종은 평생 이완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아꼈다.

 

이완용덕에 순종의 아들 의천왕은 이토히로부미가 역정을 낼정도로 일본 유학생활 내내 돈을 물쓰듯 쓰며 사치를 즐길 수 있었다.

 

 

6. 팔도의 유생들은 내부 사정을 알지 못했다.

 

전제 군주 국가에서 군주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왕은 끝내 거부했지만 이완용을 필두로한 을사오적이 왕을 능멸하여 나라를 양도했다 믿었다.

 

이들의 상소문만 보고 대한매일신보 등이 내용을 확정지어 보도했다.

 

고종은 끝까지 침묵했다.

 

고종의 퇴위를 이유로 민중들이 이완용의 집을 불태우자

 

고종은 '그같은 자가(충신) 집이 없어서는 안된다'며 이완용에게 저동에 있는 왕실 소유의 저택을 양도하기까지 했다.

 

매일같이 이완용을 죽여달라 상소문을 올려대던 유생들은

 

그야말로 이게 무슨 짓인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나 진실을 알리가 없었다.

 

이완용이 암살 미수를 당할때마다 고종은 위로금과 술을 보냈고

 

순종은 이완용의 사직서를 반려하기까지 했다.

 

 

7. 아래 목록은 실제 고종과 순종이 이완용을 위해 힘쓴 기록들이다.

 

1908.1. 고종 퇴위 사건으로 이완용의 집이 불타자 이명복은 저동에 있던 남녕위궁을 하사했다.

 

1909.12. 이재명의 암살미수로 이완용이 중태에 빠지자 궁중에서 전의 2명이 급파되었다.

 

이명복 부자는 입원 기간 중 매일 시종을 보내 위문하고 위로금으로 3천 원을 내렸다 (1910년 이완용이 중추원 고문이 될 때 그 연봉이 2천 원이었다).

 

이완용이 퇴원 후 온양으로 요양을 가자 궁내부 대신을 칙사로 보내 술과 다과를 하사했다.

 

1910.5. 이완용이 치료를 이유로 총리대신 사직서를 제출하자 순종은 반려시키고 온양에서 휴식조치했다.

 

1910.8.18. 순종 이척은 이완용을 치료한 대한의원장 의사 키쿠치에게 태극훈장을 수여했다.

 

1910.8.21. 황비 윤씨가 이완용 아내 조씨에게 서봉훈장을 수여하고 정경부인 훈1등으로 승격시켰다.

 

1910.8.26. 한일병합 발표 직전, 이척은 이완용에게 금척대수훈장을 수여했다.

 

1915.1. 이완용이 이척에게 표범박제를 진상하자 이척은 은제가베기구1조를 하사했다.

 

1918.6. 이완용의 회갑연에 이명복 부자는 수차로 1,450원의 축하금을 내렸다.

 

1924.4. 아들 이병길이 결혼하자 이척은 금시계, 금비녀, 금반지와 비단을 내렸다.

 

1926.2. 이완용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자 이척은 원기를 살리라고 포도주를 보냈다.

 

 

 

 

 

결론

 

이완용과 대한제국 황실은 그야말로 운명 공동체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고종과 순종은 이완용이 죽을때까지

 

백성을 어떻게 빨아먹던 말던 왕가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해준 이완용을 극진히 아꼈다.

 

일은 깡패 보스가 설계하는데 행동대장만 비난하고 있으니 역사에 이런 촌극이 어디있을까?

 

이완용이 처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발버둥에 대해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비참한 상황에서도 대의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은 분명 존재하니까.

 

방향성의 문제다.

 

이완용이 까이려면 고종을 세트로 묶어야 한다.

 

고종 없이는 매국노 이완용이 완성될 수 없고

 

이완용 없이는 매국노 고종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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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빵긋)

 

 

 

앞으로 이완용 욕할 일이 생기거든 고종도 시원하게 같이 욕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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